캐릭터의, 캐릭터에 의한, 캐릭터를 위한 <엄브렐러 아카데미>
"버릴 게 없어~" 음식을 하는 분들이 좋은 식재료를 만나면 이런 말을 많이 하시잖아요. 뭐 하나 버릴 게 없다고. <엄브렐러 아카데미>가 딱 그런 것 같아요. 각본, 연출, 캐릭터, 미술, 음악까지. 뭐 하나 버릴 게 없어요. 그중에서도 특히 캐릭터가 훌륭한데 주연급 배우들 외에도 비중이 적은 몇몇 악역들까지도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작품입니다. 굳이 없는 걸 찾자면 상대적으로 이슈가 덜 됐다는 점일까요. 그래서 이렇게 늦게나마 <엄브렐러 아카데미>에 대한 썰을 풀어 없는 걸 메워보고 싶었습니다.
엄브렐러 아카데미, The Umbrella Academy, 2019
제작 스티븐 블랙먼
출연 앨런 페이지, 톰 호퍼, 로버트 시한, 아담 고들리
줄거리가 간단한 작품은 아닙니다. 우선 시작은 1989년입니다. 그 해 10월, 기이한 일이 벌어지는데 임신을 하지 않았던 여성들이 갑자기 아이를 낳아요. 한 둘이 아니라 43명이나. 정말 밑도 끝도 없이 이상한 일이죠. 그런데 그중 7명을 하그리브스라는 괴짜이자 천재인 그리고 아주 부유한 과학자가 입양합니다. 그는 입양한 아이들을 자신의 저택에서 함께 키우는데 그냥 키우는 게 아니라 악당을 물리치고 지구를 지키는 히어로 군단으로 키워내요. 성인이 아닌 교복을 입은 청소년 히어로 군단이요. 사실 그 아이들은 모두 각자의 능력을 지닌 초능력자들이었거든요. 바로 <엄브렐라 아카데미>의 탄생입니다.
이쯤 되면 아, 초능력을 지닌 아이들이 힘을 합쳐 악당을 물리치는 이야기 구만. 어벤저스 주니어판인가? 할 수 있겠지만 사실 드라마에서 아이들이 악당과 맞서는 장면은 거의 나오지 않아요.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들이 성인이 된 시점부터 시작됩니다.
사실상 해체하고 각자의 삶을 살던 히어로들은 아버지, 하그리브스의 부고 소식을 듣고 집으로 모입니다. 집으로 모인 이들은 더 이상 합이 잘 맞는 히어로 그룹이 아니에요.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들은 마치 명절에 모인 사이 나쁜 형제들처럼 서로를 디스 하기 바쁘죠.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해요.
그 와중에 17년 전 실종됐던 아카데미의 일원 ‘넘버 5’가 나타납니다. 타임슬립 능력자인 그는 실수로 미래에 갇혔다가 간신히 돌아오게 되죠. 그리고 가뜩이나 골치 아픈 이들에게 엄청난 소식을 전합니다. 얼마 뒤 인류가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고. 그리고 우리가 다시 뭉쳐 그걸 막아내자고.
사실 히어로물이라기보다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무시무시한 악당들이 등장하고 주인공들은 늘 그렇듯이 열심히 맞서 싸워요. 다양한 초능력자들이 등장하다 보니 화려한 액션과 CG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초점은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7명의 식구들이 각기 어떤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지, 또 그걸 어떻게 서로 힘을 합쳐 극복해나가는지에 집중돼있습니다. 일종의 가족 성장 드라마죠.
이야기는 굉장히 빠르게 전개됩니다. 주인공들이 할 일이 참 많아요. 어딘가 석연치 않은 아버지의 죽음도 밝혀내야 되고 며칠 남지 않은 종말도 막아야 됩니다. 게다가 워낙 어린 시절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은 탓인지 다들 본인의 능력과 관련된 트라우마를 하나씩 가지고 있어요. 놀랍게도 드라마는 이 모든 이야기를 10개의 에피소드 안에 풀어냅니다. 중심이 되는 몇몇이 있긴 하지만 기어코 거의 모든 인물들의 배경을 들려줘요. 조연급 캐릭터들은 물론이고 악역들에 대한 비하인드까지 모두 풀어냅니다. 각 캐릭터에 대한 반전도 쏠쏠해서 주인공 중 한 명은 흑화를 하기도 하고, 악역 중 한 명은 본인의 직업에 지속적으로 회의를 품다가 일을 그만두기도 합니다.
이토록 복잡스러운 이야기가 무리 없이 전개되는 이유는 뭘까요. 저는 순전히 캐릭터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캐릭터들이 일관성이 있어요. 각자의 배역들은 본인들이 이 상황에서 어떤 대사를 뱉어야 할지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사 하나하나 버릴 게 없습니다. 가벼운 말 한마디도 그 캐릭터를 분명히 드러내 주고 있거든요.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쉴 틈 없이, 그리고 착착 맞물려 진행됩니다.
‘일관성 있는 캐릭터’라는 건 너무나 당연한 말 같지만 실제로 그 일관성이란 걸 흔들림 없이 끌고 가는 건 쉽지 않나 봅니다.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명작들 스카이캐슬, 왕좌의게임 도 잘 나가다 마지막에 이 당연함을 잊어버리고 막을 내린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요. 다행히 <엄브렐러 아카데미>는 이걸 끝까지 지켜냈고 썩 나쁘지 않은 결말까지 보여줍니다.
캐릭터가 워낙 뚜렷하다 보니 어딘가 시트콤스러운 면도 있습니다. 시트콤은 보통 모든 캐릭터들이 조금씩 과장되어 있고 그걸로 웃음을 유발하잖아요. 시트콤처럼 엉뚱하진 않지만 이 드라마의 등장인물도 예사롭진 않습니다. 임무를 수행해야 하지만 회사 활동비가 줄어들어 이제 둘이서 한 호텔방을 써야 하는 걸 알게 된 킬러 헤이즐은 말합니다. "어우, 이놈의 비용절감!"
이런 귀여운 악당들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종말을 다루고 있음에도 별로 어둡지 않습니다. 곳곳에 묻어있는 블랙코미디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인류의 멸망 같은 심각한 주제는 머릿속에서 지워지게 돼요.
에니어그램이라는 성격 유형 이론이 있습니다. 사람을 9가지 성격 유형으로 분류하고 각 유형들이 상황에 따라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지 분석한 심리학 이론인데요. 유형을 하나씩 읽다 보면 상당히 깊이 있게 분석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미드를 만드는 작가들이 캐릭터를 짤 때 에니어그램에 기초해 캐릭터를 짠다고 들었는데요. 일관성 있으면서도 입체적인 캐릭터를 만들기에 좋은 예시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마 <엄브렐러 아카데미>의 캐릭터를 만들 때 역시 작가들이 에니어그램을 활용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다양하면서도 뚜렷한 캐릭터가 나오기 어려웠을 것 같거든요. <엄브렐러 아카데미>를 정주행하고 캐릭터에 해당되는 에니어그램 유형을 매칭 해보는 건 어떨까요. 아주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입니다.
원작이 있는 작품입니다. 락밴드 마이 케미컬 로맨스의 리더 제라드 웨이가 지은 동명의 만화가 원작입니다. 제라드 웨이는 드라마에 삽입된 모든 OST를 직접 골랐다고 하는데요. 대부분 70-80년대를 풍미한 명곡들이 곳곳에 들어가 있습니다. 역시 뮤지션이다 보니 선곡도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