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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과 Oct 17. 2023

바질과 알렉산더

[바질키우기 3단계] 옮기기

바질의 어원은 '바실레스프'. 그리스어로 왕을 뜻한다. 원산지는 인도인데 알렉산드로스 3세에 의해 그리스로 전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쟁의 와중에도 타지에 있는 작은 식물에 감탄하고 그것을 다른 화려한 전리품들과 함께 소중히 옮겼을 누군가를 생각하니 경이롭다. 고대 그리스인과 현대 을지로인의 모습 그리고 서로가 만들어낸 풍경은 완전히 다른 것이지만 그가 맡았을 바질의 향과 지금 우리가 맡고 있는 향은 동일하다.  


 스스로를 '혹시 나 신 아닌가?'라고 여겨 황금 갑옷을 입은채 늘 선두에서 적에게 돌진했던 알렉산더. 그는 인도에서 화살을 맞고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간 뒤에야 “이것은 신의 피가 아니라, 인간의 피로구나."라고 슬프게 되뇌며 뒤늦은 자기 객관화에 들어간다. 추정하기로 그는 그 뒤로 깊은 상실감과 우울증에 시달렸을 것이다. 신이 되어 세계를 갖고자 했던 그가 바질 같은 작은 풀때기에 관심을 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누군가에 의해 대륙을 넘어 옮겨진 바질은 유럽 전역, 특히 이탈리아에 정착해 이태리 요리에 없어서는 안 될 주요 재료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된다. 막상 인도에서는 바질을 신성한 것으로 여겨 음식엔 거의 쓰지 않는다고 하니 지금의 바질은 그야말로 세계인의 합작품이다.

 을지가드닝클럽에서 우리 바질을 키웁시다!라고 본격적으로 주창한 K는 국제선의 승무원이다. 알렉산더만큼이나 세계 전역을 누비고 있는 그는 바질을 키워 바질 페스토를 만들자는 원대한 계획까지 세웠지만 비행 일정에 치여 바질의 기쁨을 거의 누리지 못했다. 다행히 다른 멤버들에 의해 서울 곳곳에서 발아된 바질은 무사히 을지로 텃밭으로 옮겨졌다. 그렇게 퍼져나간 바질은 알렉산더 대왕 사후 동서양에 헬레니즘 문화가 꽃피웠듯 지난 봄부터 지금까지도 이곳 사람들의 마음을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지금도 유럽 어딘가 또는 미주 대륙을 누비고 있을 K가 부디 건강하길 바란다.


 알렉산더는 왜 그렇게 해외를 누볐던 걸까? 인도에서 돌아온 뒤에도 그는 바다를 통해 아프리카 희망봉 찍고 다시 그리스로 돌아오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었다. 고대인 치고 스케일이 남달랐던 건 확실하다. 바질을 키우는 데에도 알렉산더 못지않은 대범함이 필요하다. 그릇이 소주잔보다도 작은 나는 사실 바질을 키우기로 했을 때 몇 개의 화분 정도를 생각했다. 하지만 함께 바질을 심고 옮긴 구구의 생각은 달랐다. 평범한 근로자인 그는 5월부터 바질을 키우기 시작했는데 물을 조금밖에 안 줘서 거의 말라 죽이다시피 한 나와 달리 거의 모든 바질 씨앗을 발아시켜 100프로의 발아율을 자랑하는 발아왕이 됐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가지고 있던 모든 바질 씨앗을 활용해 30여 개에 달하는 바질을 추가로 발아시켰다. 그리고 그것들을 마침 양파를 수확하고 잠시 비어있던 땅에 모조리 심어버린 것이다. 바질은 그냥 화분에서나 자라는 것들 아닌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나로선 전혀 상상하지 못한 일이다.

 이렇게 여러 사람의 생각이 합쳐진 바질 키우기 (역시 다른 멤버에 의해 붙여진 '바질매니페스토'라는 공식 명칭이 있었는데 상용화가 되지 않아 가볍게 넘어간다)는 을지가드닝클럽에 가장 많은 땅을 차지한 작물 중 하나로 성장한다.  


같은 씨앗, 다른 바질. 말 그대로 그릇의 차이다



 알렉산더를 비롯해 그와 함께 전장을 누빈 장수들은 대부분 20-30대의 청년들이었다. 혈기왕성한 그들의 정복 여정이 평탄했을리 없다. 밤새 토론하고 술을 마시고 때로는 싸우기도 했던 그들은 급기야 술자리에서 서로에게 창을 던져 죽이기도 했다. 알렉산더가 인도에서 갠지스 강을 건너지 못한 것도 휘하 장교들이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며 사실상 파업을 했기 때문이다. (이미 페르시아 정복 이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칼과 창을 들고 자신들의 세계를 건설했던 그들과 달리 2,300년 뒤의 우리는 모종삽과 흙을 들고 우리만의 세계를 만들고 있다. 자신만의 무언가를 만드려는 목적은 같지만 수단과 방법은 많이 진화한 셈이다. 을가클이 만들어진 것은 고작 1년, 이제 겨울이 오고 있다. 알렉산더 사후 그의 제국은 급격한 속도로 무너졌지만 을지가드닝클럽은 그보다 오래 풍경을 간직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10월의 바질숲



tip. 바질 옮기기 

1. 흙을 통째로 심는 게 좋다. 뿌리가 상하면서 죽는 싹들이 많다.

2. 그래도 옮겨진 바질이 모두 살아남기를 기대하진 말자.

3. 적당히 자란 이후에 옮겨 심는 게 좋다. 너무 작으면 여러모로 어렵다.

4. 작다고 무시말고 간격을 벌려서 심자. 생각보다 크게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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