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때가 아름답다.

오월 그 저녁, 그 소리가 알려준 것

by ㅁㅗ하니

내 나이와 비슷한 단풍나무, 그 아래 주인 잃은 의자가 놓여있다. 아버지의 의자다. 단풍나무 아래는 아버지의 그늘막이었고, 쉼터였고, 오고 가는 자식들을 향한 그리움을 삭이셨던 곳이다.

봄이 무르익은 5월 저녁, 오랜만에 저녁을 먹고 엄마와 나란히 아버지의 의자에 앉았다. 5월 20일경 24 절기로는 소만이 되면 농촌은 모내기 준비로 한창이다. 모를 심기 위해 논에 물을 가두고 흙을 고른 후라 석양이 내려앉으면 해 질 녘 하늘과 땅은 온통 붉은색이 된다. 그날 저녁노을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만큼 색이 깊고 짙었다.

우린 아버지 흉을 보며 서로 웃었지만 웃음 끝은 눈물을 먹어 묵직해졌고 침묵이 되었다. 그래서 그런가 개구리 소리는 더 거창했고, 논 한가득 채워졌다. 그때, 그림처럼 백로 한 마리가 날아와 살포시 앉았다. 옆에 계신 엄마는 어린 아이마냥 소리 낮춰 말씀하셨다.


“ 은주야, 잘 들어봐.”


조금 지나 서로 짠 듯 개구리 소리가 잦아들어 갔다. 백로는 동심원을 그리며 소리를 지워나갔다. 한 마리가 또 날아와 앉았다. 그 순간 개구리 소리는 음소거되듯 사라졌다. 멀리 들리는 소리만 배경음처럼 남았다. 엄마와 난 마주 보며 아이처럼 깔깔대며 웃었다.


“와, 정말 신기하네. 엄만 이걸 어떻게 알았어요?”

“뭘, 살다 보면 그냥 알게 되는 거지. 개구리도 다 지 살 방법을 알어.”


돌로 꽉 찬 듯 무거웠던 머릿속이 가벼워진 느낌.


감정은 대상이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 뿌리가 깊어 원인을 알지 못해 모호하다 보니 내가 만든 허상일 때도 많다. 아버지의 상실, 아이들에 대한 고민, 일과 그로 인해 맺는 관계에 대한 어려움. 거기에서 파생되는 불안, 질투, 소유욕, 인정 욕망. 감정들이 휘몰아치는 날이면 소금에 푹 절여진 배추마냥 쳐지다 못해 난 세상에서 없어지듯 녹아내린다.


그날도 그랬나 보다. 개구리울음소리는 그런 내 마음의 문을 두드렸다.


“은주야, 살기 힘들지? 어려울 땐 그냥 지금 있는데서, 한 발짝만 떼.”


아버지가 옆에 앉아 나에게 하시는 말씀처럼 들렸다. 의자에 앉아 아버지도 이때를 지나가셨겠구나. 아버지가 아닌 한 인간으로 살아내 셨겠구나.

우리를 갉아먹는 후회와 불안은 ‘그때. 거기.’나 ‘나중. 어디쯤.’에 생각이 가 있을 때 일어난다. 개구리가 그랬듯이, 내가 그 소리에 반응했듯이 ‘지금. 여기.’에 생각을 두면 놀람, 기쁨, 긍정, 환희 같은 감정이 일어나지 않을까? 그 저녁 감정의 스위치를 돌리는 방법을 개구리에게서 배웠다.




3년째 대전지역 중등 교사 대상 책쓰기교육 연수에 참여하고 있다. 교사들의 책쓰기, 학생 대상 책쓰기교육의 실천 방법과 실습을 배울 수 있는 연수다. 매번 연수 때마다 빠른 시간 내에 신청 마감이 될 만큼 사랑받는 연수다. 그런 연수의 운영단 일원으로 활동할 수 있다는데 늘 감사하다.

올해 여름 연수 주제는 ‘내 인생의 제철 행복‘이다. 김신지 작가의 '제철행복'에서 영감을 얻어 연수 주제를 정했다. 작가는 행복이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자연이 주는 제철의 소리, 향기, 맛을 누리는 것이라 말한다.

자연만 제철이 있을까? 내 인생의 제철은 언제일까?
평소 좋아하는 작가이자 문학 평론가이신 김기석 목사님의 말씀이 더 깊은 생각으로 이끈다.


"잘 산다는 것은 내가 지금 어떤 때를 지나가고 있는지 알고, 그때에 맞는 아름다움을 살아내는 것이다."


자기가 지나고 있는 때를 아는 것이 먼저한 의미다. 감정과 생각은 평온하다가도 자극 하나에 너울처럼 요동친다. 하루에도 여러 번. 감정뿐 아니라 생각도 수시로 변하고 수정된다. 그래서 자기 문제에 집중하다 보면 삶의 방향을 잃기 쉽다. 연주자들이 악기를 연주하기 전 기준 음에 맞춰 조율하듯 잠시 멈춰 감정과 생각에서 거리를 두고 지금 지나고 있는 자연의 때에 귀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철딱서니가 없다.', '넌 언제 철 들을래?', '으이그, 애늙이같이.'라는 우리말들은 늦던, 이르던 때에 맞지 않는 행동이나 생각을 적절하지 못한 것으로 본다. 자기가 지나는 때, 지금. 여기.에 집중하라는 지혜가 담겨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오월 그저녁, 개구리 소리는 갈팡질팡 흔들리는 나에게 때를 알려주는 기준음이었다. 흔들리는 때조차 아름답다는 아버지의 위로였다.


그래, 모든 때는 아름다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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