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손
어릴 적 엄마는 아버지가 키도 크고 다리도 길어 옷걸이가 좋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 얼굴도 부리부리한 미남형은 아니지만, 흑백 사진이긴 해도 곱상한 것이 젊은 시절 여자들이 따라다녔을 거라고 흘겨보며 핀잔하시곤 했다. 그런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고 난 투덜댔다. 그런 내가 손과 발은 아버지를 닮았다. 하지만 아버지 손은 닮고 싶지 않았다. 곱상한 손이 아니다. 색도 맑지 않고 손가락 마디는 굵었고, 힘을 쓰거나 덥다 싶으면 푸르스름한 정맥 혈관이 늘어나 울퉁불퉁한 게 징그럽기까지 했다. 딱 내 손도 그렇다. 외할머니는 아버지 손이 마누라 자식 밥 굶기지 않는 손이라고 마음에 들어 하셨다.
두 달 넘게 아버지 양손은 묶여 있었다. 입원하시기 전 밥을 입에 물기만 하고 씹지 않는 횟수가 잦았다. 아버지는 씹는 법도 잊어가셨다. 입원 후엔 코로 넣은 생명줄을 뽑아 버리시려 해서 손을 묶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 갈 때마다 엄마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아이고 얼마나 답답해. 입으로 밥을 먹어야 이것도 풀고 집에 간대유. 알았지? 할매랑 집에 갈라면 얼른 기 운내야혀.”
아버지는 금방 울 것처럼 눈으로 대답하셨다.
“잉잉…”
그렇게 꼼짝없이 두 달 동안 묶여서 병원에 계셨다.
“아버지, 답답하지? 아버지 아플까 봐 그래서 묶어 놓은 거야. 빨리 나아서 집에 가요. 알았죠?”
난 미안해서 더 과장해 장난치듯 말했다. 아버지는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눈으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막내야! 나 집에 가고 싶다.’
아버지의 손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 말아야 하는 것만 해버리는, 쓸모 없어진 손. 쓸 일이 없어지며 손가락은 갈수록 말려갔다. 손만 그런가. 아버지의 입, 손가락, 발, 다리, 아버지가 생을 살아내는데 필요했던 몸체들, 마지막 의식까지도 쓸모를 잃어갔다. 쓸모 없어진 몸은 이제 아버지를 가두었다.
아버지 양손은 마지막 돌아가실 때가 되어서야 자유로워졌다. 고운 옷으로 갈아입고 누워있는 아버지와 마지막 인사를 했다. 아버지의 말린 손가락은 여전했다. 차가워진 손가락을 곧게 피려 주물러보았지만 그 상태 그대로라 그것이 마음을 아린다. 이 손 덕에 따뜻한 아랫목에서 잘 수 있었고,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었고, 대학까지 다닐 수 있었고, 친구들과 여행도 다녀올 수 있었다. 농기계에 손가락 끝이 잘려도 병원 가는 일 없이 그냥 그대로 아물어 뭉툭해진 손가락이 잊혀지지 않는다.
“이게 뭐야, 병원에 좀 가지 왜 안 갔어요?”
핀잔하듯 걱정하는 말에 돌아오는 답은 늘 똑같았다.
“먹고살려고 그러지. 새끼들 데리고 먹고살 돈은 있어도 거기 갈 돈은 없다. "
아버지의 손은 아버지의 평생 쓸모를 보여준다. 시골 가난한 집 맏아들로 태어나 부모와 동생들을 돌봐야 했고, 그 쓸모에 갇혀 하고 싶은 공부를 포기하고 학교 가는 친구들을 부러워하며 생업에 나갔어야 했다. 아버지의 쓸모는 자신에게 묻지 않고 주어졌다.
최아영 작가는 그림책 ‘나의 쓸모’에서 물건들의 쓸모를 빌어 ‘쓸모’에 대해 말한다. 장독, 주전자, 와인잔은 처음과 다르게 화분으로 쓰인다. 화병도 깨져 더 이상 꽃을 담을 수 없게 되어 버려지지만 화분으로 쓰이게 된다. 화병에서 화분으로 그 쓸모가 달라졌다.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얼까? 내 쓸모는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의 요구와 필요에 반응하는 거란 걸 말하려는 거 아닐까? 다른 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찾고 그것에 마음을 담아 해낼 때 내 쓸모가 이런 거구나 알게 되는 거다. 책 뒷 표지에는 ‘당신의 쓸모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쓸모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 삶에서 만나는 상황에 따라 변화되는 거란 걸 알게 될 때, 일방적 희생이 아니라 남의 쓸모를 거름 삼아 만들어진다는 걸 알게 될 때, 진정 쓸모의 의미와 가치를 알게 된다고 말하려는 듯하다.
‘쓸데없는 일’, ‘쓸데없는 말’처럼 우린 끝없이 ‘쓸모 있음’을 요구받고 질문받는다. 그래서 자신에게도 끝없이 질문한다. 내 쓸모는 뭐지? 내 삶의 의미는 뭐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지? 그러면서 반동으로 사회와 가족의 요구를 거부하고 내 쓸모를 스스로 선택하겠다고 말한다. 내가 그랬었다. 아버지는 어떠셨을까? 나도 아버지의 나이를 지나고 있다. 지금 내가 가진 질문을 아버지도 하셨겠지. 나처럼 아버지도 질문할 마음의 여유가 잠시라도 있으셨길. 나이 들어가며 변화된 아버지의 쓰임이 있었겠지. 부모와 동생들을 부양하고, 결혼해 가족을 부양하고, 그걸 지켜내기 위해 자신을 쓰셨겠지. 무엇보다 진정으로 마음을 다하셨단 걸 아버지의 손에서 알게 되었다.
옛말에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라는 말처럼 아버지의 부재는 거짓 같은 현실이다. 장 폴 샤르트르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말한다. 인간의 존재는 의미보다 선행한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일을 하고, 왜 존재하는지 보다 ‘있음’ 자체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그래서 쓸모를 곱씹어 보았다. 목적을 위한 쓰임뿐 아니라 존재 자체도 쓸모이지 않을까. 5년이란 시간 동안 아버지의 쓸모가 서서히 줄어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아버지의 존재감은 더 드러났다. 아니, 없음도 쓸모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도 나를 키우고 계신다.
내 손이 아버지의 손을 닮아 그나마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