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한국건축은 죽었다. 오늘의 한국건축은
자본과 기술, 그리고 행정이 지배한다.
그 사이에서 건축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나 사색, 정체성, 의미 없는 듯하지만 필요한 토론, 미학적 논쟁… 모두 사라졌다.
하긴 생기 있게 활동한 적도 없었다.
퇴계이황이 유희적 건축을 즐긴 낭만주의자였음을 오래전글애서 읽었다. 하지만 그 또한 건축을 중심으로 살아간 사람이 아니다.
어쩌면 요즘 말하는 많이 다녀보고 경험해서, 창작욕구가 솟구쳐 기술자들 불러서 이리저리 해본 여유 있는 양반이 아니었을까? 돈 많고 잡지 많이 본 스타일에 익숙한 분들이 말로 이리저리 명령하고, 기가 막히게 도면화해 오는 “건축가” 타이틀의 인물을 소비하는 것을 보면 왠지 그랬을 듯하다.
몇 년 전? 십수 년 전부터 국가에서 건축을 문화라고 느닷없이 주목하면서, 상을 뒤지기 시작했다. 반백년 노벨상을 부르짖다가 어려울 듯해서 포기한 건지 갑자기 다른 장르에서 최고상을 찾기 시작한다. 식민지 경험의 열등의식 DNA가 만들어진 뒤로 헤어 나오질 못한다. 그 덕에 베를린 영화제 수상에 열광하고, 아카데미 수상에 온 국가가 떠들썩하다. 무슨 영국이나 미국 문학상수상에 온 방송과 인쇄매체가 떠들썩하다. 모든 분야에서 세계각국의 상들을 컬렉션 하듯 앞다퉈 받으려고 노력한다. BTS가 그래미상을 안 받는다고 그 영향력과 성과가 빛이 바래는 것도 아닌데 각종 매스컴에서는 장탄식이다. 정작 그들이 정말 간절히 원할지 안 원할지 모르지만…
인정은 중요하고, 수상은 창작에 대한 경의와 존중의 의미도 있다. 특히 노벨상이나 프리츠커상 같은 경우는 경쟁이 아니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 문제는 이런 존중과 경의가 아닌 경쟁의 결과로 이해하는 우리 인식이다. 경쟁에서 승리하는 시각에서 문화에 대한 사회적 열망은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
그런데다 이런 사회적 열망에서 건축도 숟가락 하나 올려놓고, 느닷없이 프리츠커상을 받자고 한다. 심지어 정부에 서는 프리츠커 수상을 위한 미래인재 육성이라면서 해외 연수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코미디가 따로 없다. 유명한 렘쿨하스가 장학금으로 미국에서 공부하고, 영국에서 Lord라는 세습 작위 받은 건축가 노만 포스터가 장학금으로 공부했다는 말을 들었지만 선진화된 건축사무소에 정부지원으로 연수했다는 말은 생소하다.
어쩌면 르꼬르뷔지에 사단들이 전 세계에 퍼져 그의 건축 사상과 미학이론을 설파한 데서 영향을 받았는진 모르겠다. 설마 그렇게 깊은 뜻이? 그럴 리가……
이런 모든 형식적 행위 말고 정말 건축에 대해 시선을 두어보면, 프리츠커는 고사하고 국제사회에 주목받기조차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왜냐면 우리나라에서 건축은 창작의 결과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건축가들이 술 한잔에 떠들어도 모른다. 왜냐면 우리 사회에서 건축이 살아있음을 인정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건물과 부동산 가치로는 인정받았어도……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한국 건축은 죽은 것이다. 심폐소생이 아닌 쥐라기 공원처럼 DNA를 만들어야 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