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경험이 75년을 붙잡고 있다-1
우리나라 건축의 기회는 60년대였다. 척박하고, 건축이 뭔지도 몰랐던 시절이었지만, 오히려 백지상황으로 누구든 판을 만들 수도 있었던 기회이기도 했다.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 한 마디로 꼰대 없던 시절이었다. 해본 사람도 없었기에 뜻이 있는 이들이 건축의 기반을 잡을 수 있었다. 더구나 대학진학률이 한자리숫자였으니 무조건 하는 놈이 장땡인 시절이었다. 물론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상상하긴 힘들다.
왜 기성건축가가 없었냐고 묻는 다면, 우리의 시대를 이야기해야 한다. 노론 중심의 권문세가는 친일파로 태세전환해서 조선 왕조인 이 씨 일가로부터 권력을 일본에 넘겨주었다. 단지 왕권을 넘긴 것이 아니라, 이나라 주권을 그들의 작위와 물질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아둔한 자들은 어쩔 수 없는 시대 운운 하지만,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무혈로 조선을 합병하는 행운을 일본에게 준 것은 이들 친일파 권력자들이었다. 역사를 기록하는 문명국가, 왕조중에 이렇게 다른 나라에 국가전체를 넘긴 경우는 거의 없다. 총칼로 싸우다 빼앗겼다면 덜 아쉬울테지만….
자! 그럼 이런 식민지가 우리나라 건축과 무슨 상관이냐면… 우리나라 청년들의 미래를 우리나라가 정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일본의 정책과 방향에 따라 국가 인재들의 방향과 미래가 결정된다. 흥미롭게 일본은 조선인에게는 건축가, 즉 국가 면허(?)의 전문직인 건축사를 부여하지 않았다. 물론 일본인들에게도 쉬운 자격은 아니었고, 일본의 귀족 집안이나 사무라이 집안에서 건축사를 했다. 혹자는 조선인이 건축설계를 한다는 것은 일종의 우두머리 역할이라 진두지휘를 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한다. 아무튼 조선미전에서 최고의 상을 받고, 경성제국대학에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 알려진 이상이 조선총독부 건물 관리하는 영선과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보면 알 것도 같다. 월급 나오는 영선과가 이상의 선택일 수도 있으나, 그보다 그의 시를 보면 좌절이 아니었을까 추측할 수 있다.
재능도 능력도 되는 이십 대 청년이 자신의 끼를 주체 못 해서 힘들어하는 경우들을 많이 본 오늘의 꼰대입장애 선뜻 이해가 된다.
이렇게 일본 식민지 시대에 수많은 조선인 건축 지망생이 있었을 듯한데, 최종 건축사 자격을 받은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나마 상당수는 창씨개명인 것을 보면 그들의 실상을 알 수 없지만, 친일의 내색을 보여야만 허용되었던 것 같다. 대다수 조선인은 일본건축사 보조 역할만 가능했다.
서론이 길었는데, 자의가 아닌 타의로 근대화 시점을 빼앗긴 덕분에 자력불능으로 추락했다. 거의 사십 년 시간 동안 사회적으로 배양되지 못한 데다 북한의 침공으로 전쟁 쑥대밭이 된 덕분에 그나마 있던, 건축사보조는 더 줄었다. 전후 재건 시대에 건축수요는 폭증했는데, 이를 채워줄 전문인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대서소 같은 곳애서 단선으로 대충 그린 설계 아닌 작도로 건물을 마구 짓는 시기가 있었다. 전문적인 학습과 토론이 부족함은 당연했고, 재건에 참여하는 건축은 건설이 주도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비바람을 피해야 하니, 찬밥 더운밥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서있는 건 벽이고 바닥과 지붕은 가리면 되는 상황이었다. 명석하고 눈치 빠르고 부지런하면 건설에 뛰어들 수 있었다. 부실시공이라는 딱지가 붙은 이유도 사실 교육도 안 받고 경험으로 마구잡이로 뛰어든 이런 사회적 상황 때문이다. 워낙 급하니 아무 건물이나 짓고 산 것이다. 판잣집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이때 집장사로 오늘의 재벌로 성장한 기업이 하나 둘이 아니다.
변명 같지만 이런 시대이다 보니, 건축적 토론을 하면서 건축을 한다는 건 배부른 소리를 넘어 귀신 씻나락 까먹는 것이었다. (그래도 했어야 했고, 분명 누군가는 했겠지만 남아있는 흔적은 거의 안 보인다.)
그 시대를 공부해 보면 참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