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경험이 75년을 붙잡고 있다-2
어쩌면 조선시대의 강제 종식 이후 해방까지 우리의 자생적 기운은 완전 뿌리째 뽑혔던 것 같다. 혹자는 그래도 뭔가 새로운 것이 만들어졌지 않냐라는 말을 하는데, 지진 없는 새 땅을 그냥 두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다. 누구라도 좋은 자원이 꽁으로 생겼는데 활용 안 할까? 아무튼 친일파들 덕에 반세기를 허송세월해서 리셋해야 했다.
해방이후 변화를 보면, 놀랍다. 반세기 빈 여백이 있었는데,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적응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기록으로 이천 년 넘은 역사를 가진 나라여서 그럴까? 시스템 국가로 운영해 온 잠재적 역량이어서 그렀을까? 심지어 한국전쟁까지 겪었음에도 단 15년 만에 빠르게 정리되는 상황이었다. 그런 기운은 1959년 국회의사당 설계공모가 대표적이다.
참! 다시 생각해도 놀랍다. 해방 이후 15년, 한국전쟁 발발 후 10년.. 그리고 419 직전인 1959년 국가적 프로젝트로 국회의사당을 신축할 생각을 하다니.... 한국전쟁은 1953년에도 국지전으로 있었으니 59년의 프로젝트 진행은 대단하다. 이런 과감한 결단과 의지가 우리 DNA 인지 모른다. (잠시 국뽕 한방!) 당시 도쿄에 유학하던 28살 청년 김수근이 등장한 프로젝트였다. 이 또한 놀랍다. 청년 김수근의 설계를 당선시킬 정도의 과감함이라니...... 이는 36세의 도미니크페로가 파리 미테랑도서관 당선된 프랑스에 필적할 건축환경이었던 셈이다. 이미 당시 기성 건축가로 볼 수 있는 정인국, 엄덕문, 이희태, 김중업 같은 분이 있었고, 이광노, 김정수, 이혜성, 강명구 같은 젊은 건축가들이 존재했었다. 그런데도 28살의 건축학도 작품을 선정함에 놀랄 수밖에 없다. 지금은 이런 선정은 온갖 신문과 방송, 각종 SNS에서 난리 날 일이지만, 이런 의사 결정의 역사가 사라진 것이 너무 아쉽다. 물론 해방과 전후 아무것도 없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라 하지만
그러면 60년대 당시의 건축가들은 누구였던가?
지금은 자료도 없어지고 철거도 상당수 되어 남아 있는 건축이 별로 없지만 이들의 성과도 적지 않았다. 지금 봐도 새로운 제주 국립대학교, 서산부인과, 양화진성당, 명동 유네스코회관 등이 있었다. 60년이 흐른 지금 봐도 이들의 표현은 놀랍다. 건축이란 것이 창작의 결과인데, 과거라고 창작의 천재성이 없을 거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이런 창작의 과감함을 사회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정말 아쉽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조선의 흔적과 식민지 시대의 근대건축 양식 건물들이 전쟁시기 파괴되었고, 7,80년대 산업화되면서 대부분 헐리고 만 것이다. 자존심이 상하는 식민지 시대의 모든 것이 미웠던 그 시절, 군중심리도 작용해서 아무도 철거에 문제제기를 안 했다. 더구나 마을길도 넓히고 초가집도 없애는 분위기라 무조건 새것이 찬양받고 지어졌다. 후학으로 이 시기가 아쉬운 이유는 시대 재건과 미래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건축으로 발언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혹자는 재건에 급급한 사회에서 할 일이 태산 같았기에 굳이 그런 미래이야기는 필요치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시대적 전환기에는 토론, 논쟁, 치기 어린 도전이 허용되는 시기이기에 발언이 있었어야 했다.
한국 건축의 성장을 위해서 건축가들은 성숙되지 않더라도 자기 생각을 드러내고 토론했어야 한다. 바로 이점이 식민지로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후유증이다. 김수근의 부여박물관애서 촉발된 왜색 논쟁은 형태에 대한 감정적 논쟁보다는 좀 더 아카데믹한 지역성과 장소성, 문화적 정체성등의 토론이 있어야 했다. 1960년을 살아가는 당시 건축인들이 고민하는 공간에 대한 고민, 이미지에 대한 방향성, 미래에 대한 사회적 고민에 대응할 준비등이 남아있지 않다. 사실 스타일 논쟁도 부여박물관 외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미스 반 데 로에의 시그램 빌딩이 연상되는 3.1 빌딩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단지 높다는 것 외의 다양한 이야기들… 나중에 김중업의 3.1 빌딩이 내적으로 얼마나 독자적 건축이었고 집요한 고민의 결과였음을 알게 되었다.
아무튼 이런 발언을 하면 누군가 말한다. 논쟁할 건축이 있었냐고? 천만에… 그 시대에 몇몇 건축가들은 엄청난 고민의 흔적을 만들어냈다. 위에 언급한 것을 다시 말하지만 60-70년대에 기성 건축사들은 젊은 나이로 다양한 기회를 맞이한 건 사실이다. 양화진 성당이나 국립극장을 설계한 이희태 건축사등은 40대 초중반이니 얼마나 젊은 시절이었는가? 어쩌면 너무 이른 나이에 바로바로 지어지는 상황이어서 토론이 필요 없었을지 모른다. 이론도 좋고 개념도 중요하지만, 건축은 눈앞에 서있는 실체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충분히 토론할만하고 비평할만한 건축들이 무수히 지어졌다. 해방과 전후, 국가 정체성 정립과 체제경쟁의 상황에서 지역적 정체성(Vernacular)을 고민한 몇몇 결과물들은 30대 김수근의 부여박물관 이상이었다. 미래에 대한 투자로 이분들이 더 치열하게 토론하고 대중과 교감하고 자신의 관점을 왜 주장하지 않았을까?
결국 식민지 시대의 반세기가 사고 능력을 상실시켰고, 전후 복구와 재건의 시간 속에 건설이 중심이 된 건축... 어느 정도 공급과 안정이 채워진 다음에는 자산의 가치, 즉 부동산이 건축을 잡아먹어버렸다. 이렇게 건축은 왜소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