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 넘쳐나는 상업카페건축 1

일본이나 유럽은 미술관 건축, 우리나라는 카페건축

by 홍진

2010년 이후 한국의 콘크리트 카페 건축은 단순한 상업공간의 틀을 넘어선 독특한 건축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이들 건축은 '카페'라는 일상적 소비공간을 매개로 하여, 건축가가 제도적 억압이나 기능적 제약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신의 조형적 상상력과 철학을 극대화하는 무대로 변모시킨다. 특히 노출 콘크리트를 기반으로 한 부르탈리즘적 양식은 건축의 물질성과 조형성을 동시에 강조하며, 건축이 공간의 실용성을 넘어서 ‘형태로 말하기’를 시도하는 가장 직접적인 표현이 되고 있다.


한국의 공공건축과 주택은 법제도, 예산, 시공현실, 심사제도 등의 복합적인 요소에 의해 조심스럽고 보수적인 경향을 강제당해왔다. 반면, 카페는 법적 기준이 비교적 간단하고, 규모도 작으며, 건축주의 취향이 시공자나 공공기관보다 유연하다. 무엇보다 카페는 기능이 명확히 규정되지 않은 공간으로, 건축가의 해석에 따라 다양한 공간적 실험이 가능하다. 이 같은 맥락에서 카페 건축은 실용성과 규범에서 벗어난 ‘건축가의 자유의지’를 적극적으로 실현하는 장소로 기능한다. 특히 콘크리트를 재료로 선택한 이유는 단순한 유행을 넘어 물질이 가진 조형적 잠재력과 감정적 울림 때문이다. 콘크리트는 거칠고 차갑고 무겁지만, 동시에 자유롭게 형태를 만들 수 있고, 빛과 그림자의 흐름을 극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재료다.


노출콘크리트 주택 및 카페 프로젝트들, 그리고 부르탈한 매스의 곡선과 기하학적 조형을 결합한 카페 건축은 바로 이러한 경향을 대표한다. 이들은 다수의 주택이나 공공건축이 회피하는 방식으로 형태를 전면에 내세운다. 대담한 캔틸레버 구조, 거대한 매스의 중첩, 비정형적 창의 배치, 곡선과 직선의 겹침 등은 단순히 시각적 자극만을 위한 장치가 아니다. 이는 건축가가 사회적 요청이 아닌 자기 내면의 건축적 언어를 외부로 투영하는 방식이며, 그것이 가능한 유일한 건축 프로그램이 바로 ‘카페’인 것이다.


이러한 조형적 실험은 단지 시각적 결과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감각의 질서를 재편하고, 사용자의 이동과 체류 방식, 심지어 공간에 대한 기억의 층위를 새롭게 만든다. 곡선 벽면에 몸을 기댄 채 커피를 마시는 행위는 단순한 소비를 넘어 ‘머묾’이라는 존재 방식의 경험이 된다. 미셸 푸코가 말한 ‘헤테로토피아’—현실 공간의 경계에서 다른 질서를 상상하게 하는 장소—는 바로 이러한 건축에서 발현된다. 카페는 기능적 의미보다 감각과 상상력의 공간으로 진화하고, 그 과정에서 건축은 다시금 철학의 언어를 회복하게 된다.


한편, 이러한 공간의 감각화는 자본주의 소비문화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은 소비문화가 굉장히 발달한 나라다. 때문에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mable)한 공간, 즉 ‘사진 찍기 좋은 공간’은 2010년대 이후 한국 카페 문화의 핵심 전략이 되었다. 이로 인해 건축은 종종 시각적 기호로 환원되고, 감각은 이미지 소비로 전락할 위험에 처해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시장적 요구로 인해 건축가들은 조형적 실험을 통해 자신의 건축 언어를 표현할 수 있었다. 이는 건축가가 예술가와 마케터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새로운 시대의 과제임을 의미한다. 카페라는 프로그램은 비록 상업적 목적을 지니지만, 그 안에서 건축가가 의도한 서사, 물성, 감정, 기억의 층위가 담긴다면, 그것은 소비를 넘어선 존재가 된다.


이러한 건축은 현대 한국 도시가 놓인 상황을 반영하기도 한다. 급속한 도시화, 획일화된 아파트 문화, 공공성의 붕괴 속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사적 상업공간에서 공공의 감각을 갈망한다. 카페는 그 틈새를 채우는 공간이다. 외부에서 보면 그것은 단순한 매장이지만, 내부에서는 개인과 타인이 스치고, 혼자 머물고, 관조하는 일상이 만들어진다. 이처럼 카페 건축은 한국 도시의 실질적 공공공간의 빈자리를 보완하며, 작은 건축이 거대한 도시 문제에 응답하는 방식이 된다. 이는 하버마스가 말하는 ‘공론장의 재구성’으로까지 해석할 수 있으며, 건축이 공간 구성만이 아니라 사회적 기능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재확인시킨다.


그러나 이 자유와 실험의 공간은 이면에서 중요한 철학적 물음을 제기한다. 과연 이 조형은 단순한 마케팅 전략인가, 아니면 존재의 깊이를 담은 건축적 언어인가? 루이스 칸이 ‘건축은 존재의 침묵을 들려주는 것’이라고 했을 때, 그 침묵은 단순히 눈에 띄는 형태나 거대한 매스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간에 깃든 시간성과 감정, 즉 장소가 되기 위한 본질적 조건을 말하는 것이다. 일부 카페는 그 조건을 진지하게 고민하며, 공간의 빛과 재료, 사람의 흐름과 감정의 결을 정교하게 구성한다. 반면 일부는 형태의 자극만을 남기고 사라지는, 수명 짧은 마케팅 건축으로 퇴락하기도 한다.


결국, 이 부르탈리즘적 카페 건축들이 보여주는 것은 ‘자유’의 역설이다. 건축가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표현의 자유가 열려 있지만, 그 자유는 자본의 틀 안에서만 허락된다. 동시에 그 자유는 전통적 의미의 기능이나 공공성을 포기하고 얻은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건축은 진정한 의미의 ‘좋은 건축’인가? 혹은 시대의 틈에서 잠시 허용된 ‘건축적 환영’일 뿐인가? 이러한 질문은 단순히 카페 건축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날 한국 건축 전체가 처한 정체성과 직면하고 있는 딜레마다.


카페 건축은 더 이상 단순한 부차적 프로그램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 건축의 새로운 문화적 실험장이고, 건축가의 철학이 현실에 투영되는 가장 생생한 장르이다. 그 안에서 건축가는 단지 공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감각, 인간의 삶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 질문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건축을 통해 무엇을 보고, 느끼며, 기억하고자 하는지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2010년 이후의 콘크리트 카페 건축은 단순한 양식적 흐름이 아닌, 한국 건축이 ‘자기 정체성’을 실험하고 구성하는 복합적 담론의 장이다. 그것은 공간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조형의 실천이 만나는 접점이며, ‘건축이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의 경계를 다시 그려보는 살아 있는 질문이다.


#건축 #한국건축 #건축감상 #건축분석 #상업건축 #cafe


keyword
작가의 이전글짧게 소비되는 한국 건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