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보다 느린 건축문화의식, 이젠 우리도 도전해 볼 수 있다.
건축의 전위, 그리고 부재의 증명 — 1960~70년대 세계 건축 실험을 구경만 할 수 밖에 없었던 한국
건축이 한 시대의 가장 급진적인 언어였던 순간이 있다. 그것은 바로 1960년대에서 70년대 사이, 전후의 재건과 산업화, 냉전의 분열과 평화운동이 충돌하던 그 혼란과 열망의 시절이었다. 기술은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던 무기로부터 일상의 재구성 도구로 변모하고 있었고, 예술은 제도와 권위에 저항하며, 새로운 존재의 질서를 말하려 했다. 건축은 그 사이에서, 기술과 예술, 정치와 공동체, 인간과 자연의 균열 위에 새로운 상상을 설계하는 언어로 거듭났다.
다만 그것은 산업사회를 먼저 구축하고, 식민 제국을 건설한 그들의 상황이었다. 이유불문 하고 그들 중 하나에 의한 지배를 받은 우리는, 피지배경험 탈출이 우선이어서 이런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프랑스의 68혁명이나, 월남전쟁이 자극한 미국의 히피문화와 유럽의 반 문명 운동등 우리 청년들에겐 낮선, 그리고 이해못할 움직임이었다.
산업사회를 순차적으로 겪은 그들은 그들의 갈등을 격렬하게 격고 있었고, 건축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시절 건축은 단순히 짓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에 대한 철학적 발언이었고, 현실에 대한 물리적 질문이었다. 구조물을 넘어서 사고의 틀을 흔들고자 한 자들은 많았다. 피터 쿡과 론 헤론이 이끌었던 아키그램(archgram)은 기계와 도시를 기생적 관계로 묘사하며, 도시를 ‘플러그 인’ 가능한 유기체로 상상했다. 그들의 드로잉은 건물보다는 선언문에 가까웠고, 그것이 오히려 건축의 본질을 더욱 첨예하게 드러냈다. 이들은 공간을 그리되, 공간 이전의 개념을 먼저 흔들었다. 상상력은 벽이 아니라 선언문 위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짓지 않는 건축’은 오히려 가장 급진적인 건축으로 남았다. 그리고 20대였다. 열정의!
항상 그렇 듯 유럽 여기저기서 젊은 건축가들의 자기주장과 발언은 연이어 터져나왔다. 이탈리아의 슈퍼스튜디오(. Superstudio )는 더 나아가 장소와 기능, 심지어 건축의 논리 자체를 부정하는 Continuous Monument를 내놓는다. 반복되는 백색 그리드가 지구 전체를 뒤덮는 이 상상은, 건축이 더 이상 인간을 중심에 두지 않으며, 어떤 신성한 질서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그들은 모더니즘의 조형적 산물을 계승하지 않겠다고 말했고, 그것은 파괴가 아니라 전복에 가까운 지적 시도였다.
그러나 건축의 전위는 상상 속에만 머물지 않았다. 미국의 건축 실험가들은 그 상상을 직접 땅에, 혹은 사막 위에 실현했다. 텍사스에 지어진 앤트팜의 House of the Century는 유기적 곡선의 콘크리트 덩어리였고, 이는 1960년대 중반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태어난 건축적 조각이었다. 반문화의 흐름은 건축에도 영향을 주었고, 팽창식 건축을 실험한 인플레이터블 그룹은 바람을 공간의 재료로 삼으며 Dome Over Manhattan이라는 상상의 돔으로 도시를 덮었다.
이러한 흐름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환을 시도한 인물 중 하나는 버크민스터 풀러였다. 그는 기술을 인본적 사유의 재료로 삼았고, Geodesic Dome이라는 발명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공간 시스템’이었다. 그가 설계한 구조는 공동체적 삶과 생태적 연대를 위한 실험이었다. 그 정신은 콜로라도 사막에서 실현된 Drop City나 뉴멕시코의 Earthship Biotecture로 이어지며, 건축을 공동체적 생명력의 그릇으로 만든다.
이 시기에는 쿠프 힘멜블라우(Coop Himmelb(l)au)의 등장도 눈여겨볼 만하다. 오스트리아를 기반으로 한 이 집단은 ‘건축은 타버려야 한다’는 선언을 던지며, 구조의 비선형성과 파괴적 조형을 실험했다. 그들의 Rooftop Remodeling Falkestrasse는 전통적 건물 위에 뒤틀린 강철의 폭발적 구조를 덧씌움으로써, 건축의 일관성과 맥락이라는 신화를 파괴했다.
기술적 미래주의는 일본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꽃을 피웠다. 메타볼리즘이라는 독자적 건축운동은 전후의 폐허 위에 성장과 생물학적 조직 개념을 얹은 것이다. 구로카와 기쇼의 나카긴 캡슐타워는 교체 가능한 주거 유닛을 통해 건축의 시간성과 유기적 증식을 실험했고, 기쿠타케의 *해상도시(Marine City)*는 도시를 육지가 아닌 바다 위에 건설하겠다는 생존의 건축이었다. 건축은 더 이상 땅 위의 논리로 설명되지 않았고, 미래와 기술, 도시의 형태가 하나의 생물체처럼 설계되었다.
이러한 실험은 중남미에서도 이뤄졌다. 오스카 니에메예르의 브라질 국립국회 의사당은 공화주의적 권위와 조형적 미학이 만난 결정체였으며, 곡선과 기념비성은 기능주의를 넘는 시적 건축의 예였다. 한편, 멕시코의 리카르도 레고레타는 강렬한 색채와 빛, 폐쇄적 벽체를 통해 토착성과 모더니즘의 충돌을 하나의 양식으로 만들었다. 중남미의 실험은 종종 사회 정의, 해방 신학, 그리고 식민 잔재에 대한 반항의 건축적 형식으로 구현되었다.
이러한 흐름을 지켜보며, 우리는 불편한 질문을 피할 수 없다. 같은 시기, 한국은 어디에 있었는가. 우리는 왜 이 흐름의 외부에서 조용히 침묵하고 있었는가. 단지 경제적 후진성이나 기술력 부족 때문이었을까?
그보다는 구조적 억압이 건축적 상상력을 억눌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박정희 정권 하의 한국 사회는 산업화와 근대화라는 국가 담론 속에 모든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치하는 일에 집중했고, 그 안에서 건축은 정책적 도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이후 지체된 열정은 순수하게 도전했으나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한계 속에서도 예외는 있었다. 김중업은 바로 그 예외를 대표한다. 프랑스 유학 후 귀국한 그는 르코르뷔지에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한국적 조형을 찾아 고군분투했다. 그가 설계한 제주대학교 본관은 당시로선 파격적인 유선형 형태와 곡면 벽을 지녔으며, 기능적 반복에서 벗어나 공간의 상징성과 미래성을 실험한 흔치 않은 사례였다. 당시의 제도적 틀 안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디자인이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한국판 메타볼리즘, 혹은 ‘건축적 전위’의 가능성 자체를 증명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김중업의 그 시도는 고립되었고, 이어지지 않았다. 그의 유선형 디자인은 이후 한국 건축사에서 오랫동안 단절되었고, 해석되지 않았다.
건축은 한 사회의 지적 역량과 상상력의 표현이다. 1960~70년대 세계 건축이 보여준 실험과 철학은 인간의 존재 조건과 공간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그것은 단지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 일이 아니었다. 정치적 저항, 사회적 상상력, 생태적 대안, 기술의 시적 해석 — 이 모든 것이 얽힌 총체적 사유였다.
그 시절, 우리는 없었다. 우리는 외부에 있었고, 건축은 내부화된 기술일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 질문을 다시 꺼낼 수 있다. 김중업의 건축이 단지 ‘이국적 모더니즘’이 아니라, 전위의 기억으로 읽혀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아직 그 시대를 온전히 겪지 못했다. 하지만 그 시절을 상상하고, 언어화하고, 반추할 수는 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복권이며, 다음 세대가 그 전위를 실현할 수 있도록 건축의 질문을 열어두는 일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다시 ‘왜 건축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공간을 설계하기 전에, 개념을 상상하기 전에, 우리는 존재를 묻고, 질서를 흔들며, 가능성을 그려야 한다.
그것이 건축이 전위였던 시대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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