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으로 만들어진 주한 프랑스 대사관
서울 한복판, 충정로변 언덕 위에 자리한 주한 프랑스 대사관은 건축가 김중업의 대표작이자, 한국 현대건축이 세계건축사와의 문맥 속에서 자신만의 정체성을 발화하려 했던 최초의 실험 중 하나였다. 이 건축은 단지 외교공관이라는 기능적 의미를 넘어, 한국의 전통과 근대성, 그리고 서구문명의 충돌과 융합이라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하나의 건축 언어로서 응답한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김중업은 이 건물을 통해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건축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이 질문은 곧 그가 평생 추구한 건축 철학의 핵심으로 자리 잡는다.
1959년부터 1961년도사이에 건축된 주한 프랑스 대사관은 이후로도 한국에 있는 어떤 대사관보다도 건축적 가치를 확보한 경우다. 국내 어떤 공관과 공공건축물도 65년전의 이런 시도를 극복하고 있지 못하다. 통상 국내 공공 건축, 또는 관급 건축물들은 이리저리 결합된 익명적 건축이 대부분이다. 해외도 유사한 흐름이 있지만, 다른나라들은 대체로 "누구의 작품"으로 건축이 들어선다. 유독 한국에서는 "누구의 작품"으로 건축을 애써 무시하고 외면하고 있다. 덕분에 한국 공공 건축물들은 세련되기도 하고, 교집합처럼 구성되어 있기도 하지만 명확한 작가주의를 드러내고 있는 경우가 무척 드물다.
지금에도 이런 지경인데, 놀랍게 65년전 주한 프랑스 대사관은 명확하게 김중업 작품으로서 주한프랑스대사관을 선택하고 완성시켰다.
건축을 비평적 대상으로 여긴다면 반드시 작가로서 건축사(가)가 존재해야 하며, 그의 일관된 작가주의적 성향을 건축의 여기저기에서 표현될 수 밖에 없다. 주한 프랑스 대사관은 너무나 선명하게 김중업의 특징들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고, 그의 모험과 도전이 선명하다.
한번 들여다 보면 건축 미학적으로 주한 프랑스 대사관은 외피와 내부 공간 모두에서 ‘중첩된 시간성’의 미학을 구현한다. 외벽은 부조적인 벽체로 표현되었는데, 이는 단순한 기능적 벽이 아니라, 조형성과 상징성을 동시에 담고 있다. 벽돌을 다듬은 듯한 콘크리트 표면과 부조적 창의 배열은 마치 고대 성곽의 벽을 연상시키며, 한국의 고건축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견고한 포용’의 느낌을 전달한다. 건축의 입면은 직선적인 평면 구성과 달리 리듬감 있는 굴곡을 가지고 있어, 단순한 평면 계획을 넘어 공간의 흐름과 감정을 주도한다. 이러한 양식은 르 코르뷔지에에게서 배운 모더니즘의 조형적 언어와, 한국 건축의 공간 감각이 충돌하고 화해하는 지점에 서 있다.
흥미로운 점은 ‘담장’의 개념이다. 김중업은 프랑스 대사관이라는 ‘경계의 건축’을 설계하며, 전통 한옥의 담장을 연상시키는 ‘두른 공간’을 도입했다. 경계를 나누되 단절하지 않고, 외부와 내부의 중간지대를 만들며, 이를 통해 공간의 ‘전이(transition)’를 유도하는 전략은, 외교공간이라는 정치적 상징성을 정서적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섬세한 장치였다. 이러한 공간 개념은 단지 기능적 흐름이 아니라, 한국인의 공간 감각, 특히 ‘빈 곳의 중요성’을 미학적으로 번역한 결과이다.
건축사적으로 보면 이 건물은 1960년대 초, 한국 사회가 아직 본격적인 산업화의 문턱을 넘지 못했을 당시 지어진 것으로, 국가적으로나 건축계적으로나 ‘현대건축’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중업은 르 코르뷔지에 사무소에서의 수학과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로서는 매우 실험적인 철근콘크리트 조형과 평면 계획을 도입한다. 그러나 그가 모더니즘의 복제자로 머무르지 않았던 것은, 이 건물 곳곳에서 드러나는 ‘한국적 정서’의 해석 방식 때문이다. 그는 한국의 건축이 단지 지붕의 형태나 처마의 곡선을 재현함으로써 정체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공간의 구성 방식,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자세,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방식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고 보았다. 김중업이 지붕에 대한 고민은 한국 건축의 시각적 압도감이 표현되는 요소에 주목한 부분도 있다. 김중업의 다른 수많은 작품들, 특히 한국적 의미를 가져야 하는 경우에는 이런 지붕의 의미를 여러가지로 고려한 경우가 많다. 식민지 시대에서 나고 자란 시대적 배경은 그의 민족주의적 성향에 대한 집착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김수근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관념적인 부분에서 접근한 듯 하지만 많은 후학 비평가들이 말하는 한국적 집요함이 성공적으로 드러난 것이 있는지는 의문이 든다.
사회적 가치 측면에서, 주한 프랑스 대사관은 단지 건축적 성취를 넘어 외교적 상징으로서도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 이는 한국전쟁 직후, 국제사회와의 외교적 복원이 시급했던 시기에, 프랑스라는 유럽 국가가 한국에 외교공관을 세우는 과정에서 김중업이라는 토착 건축가에게 설계를 의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이는 외교적 공공성의 공간이 단지 기능적 건물이 아닌, 한국 건축가가 서구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만의 언어로 응답할 수 있는 무대였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이 건축은 한국인의 자존감 회복과 문화적 주체성을 되묻는 시대의 상징물로 자리 잡는다. 김중업은 프랑스의 상징을 한국의 정서로 감싸 안으며, 서구적 가치와 동양적 사유가 만나는 접점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는 건축이 단지 공간의 기술이 아니라, 문화적 담론의 장임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기술적 도전이라는 측면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한국은 건축 기술이 이제 막 철근콘크리트 구조를 대도시에서 실험하기 시작한 단계였다. 김중업은 이러한 한계 속에서도 복잡한 입면 구조, 깊이 있는 처마, 공공성과 사적인 공간의 분절을 고도로 조형화된 철근콘크리트 기술로 구현해냈다. 특히 입면의 음영 처리는 당시의 기술로는 쉽지 않았으며, 이는 단순히 시공의 문제를 넘어, 기하학적 감각과 조형 언어의 통합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는 재료를 기능적으로만 사용하지 않고, 감각적 상징으로 끌어올리며, 구조적 제약을 창의적 구성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더욱이, 구조적 독립성과 조형적 통합이 동시에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 이 건물은 이후 한국 건축이 기술과 조형을 분리하지 않고 통합적으로 사고하게 만든 모범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주한 프랑스 대사관은 김중업이 말년까지 붙잡고 있던 ‘한국의 건축은 어디에서 시작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다. 그는 전통을 장식의 차원이 아니라 공간 구성의 방식으로 받아들였고, 그것을 현대적 재료와 기술로 풀어내는 방식으로 모더니즘을 비판적으로 수용했다. 이는 이후에도 수많은 한국 건축가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 한국 건축이 단순히 서구 양식의 반복이나 자기 전통의 복제에 머무르지 않고, 양자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길을 찾도록 자극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오늘날 이 건물은 외교공관이라는 폐쇄성과 보안성 때문에 대중적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국 현대건축사에서 이례적일 정도로 철학과 기술, 정체성과 예술성이 모두 포개진 작품이다. 건축은 때로 공간을 짓는 일인 동시에 시대의 의식을 표현하는 언어이며, 그 안에서 김중업은 ‘한국 건축의 현대화’라는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처음으로 열었다. 주한 프랑스 대사관은 그의 질문, 고투, 직관, 그리고 시대와의 대화가 응축된 한 편의 시이자, 한국 현대건축사의 정신적 거점 중 하나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