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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길 Feb 16. 2024

1.2 한국 건축은 죽었다

특별하면 안 되는 한국 공공건축

우리나라의 설계공모는 대체로 공공이 발주하는 경우 아주 모호해진다. 건축가의 정체성이 없는 익명이어야 하며 무성생물처럼 이리저리 무난해야 한다. 일반인도 건축가들도 관료나 공무원도 대체로 그게 정답으로 알고 있다. 왜냐면 세금을 집행하는 기관에서 특정 건축사를 지정하면 각종 부패와 객관성 결여로 부패의 주범이 되기 때문이다. 설령 암흑의 고리 없이 당선되더라도 질투와 질시의 대상이 되어 난도질당하기도 하고 보호자 없으면 묵사발된다. 원형링으로 디자인했다가 사방에서 들이댄 어퍼컷과 잽에 반 그로기 된 천년의 문이 그 예이다. 이어령 선생도 동아줄을 못 내려줬으니…


아무튼 개성 있고 독특하면 경쟁자들의 공정성 시비에 걸릴 확률은 10,000%이고, 이런 지정식 진행은 온 국가가 난리 날 프로세스다. 이런 상황을 보는 건축사입장에서 90% 동의하지만, 10%는 동의하지 않는다. 내 똥고집. 건축이 창작이라면 창작자의 시선이 드러나야 한다는 똥고집.


건축은 창작의 산물이고 창작주체의 사상과 철학에 기반한 미학적 결과물인 동시에 그 시대와 사회를 반영한 기능과 기술의 화합물이다.


이렇듯 건축이란 것이 창의적 성과이기 때문에 건축사를 작가로 본다면 그 작품을 선택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이런 특정 건축사 선정에 문제제기가 100%라는 것은 건축을 창작하는 작가로 보지 않는 것을 반증하는 것 같기도 하다.


각설하고 현실을 인정해도 고민해 볼 사항이다. 나는 실제 건축설계공모의 심사위원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내 모토는 국민의 세금으로 건축되는 것인 만큼 책임감을 가지고 건축적 가치가 있는 작품에 가중치를 주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세금으로 건축되는 것이기 때문에 무난하고 보편적인 건축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 더해서 경제적 건축을 말하는데, 일견 맞는 말이긴 하나 경제성이 제1의 선정기준이어선 안된다. 이상한 생각이라고 지적당할 수도 있겠다.


왜 그런가 하면, 정말 무의미한 건물로 지어진 공공건축들의 수명을 보면 알 수 있다. 언제 헐려도 이의제기가 없을 듯한, 말 그대로 콘크리트 덩어리 또는 그냥 건물 수준의 공공건축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용도와 요구로 인해 철거해야 하는 요구가 커진다. 심한 경우는 몇 년 만에 헐리기도 한다. 건축의 수명을 고려할 때 과연 경제적인 건축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지어지고 십 년도 안 돼서 대대적인 리모델링으로 모습이 바뀌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이것이 경제적인가? 건축은 당장 지어지는 시점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오래 사용할 수 있는 가치와 기능을 갖는지도 중요하다. 건축 수명은 단지 구조적 안정성만 고려하는 것이 아니고, 기능이나 건축의 다양한 가치들이 고려되면서 유지된다. 시간이 축적될수록 연대기적 가치나 사회적 가치가 더해지면서 무게감을 갖는 것이다.


건축 수명은 단지 구조적 안정성만 고려하는 것이 아니고, 기능이나 건축의 다양한 가치들이 고려되면서 유지된다. 시간이 축적될수록 연대기적 가치나 사회적 가치가 더해지면서 무게감을 갖는 것이다.


핀란드의 알바알토라는 건축가가 설계한 작은 지역 커뮤니티 센터 같은 경우도 시간이 흘러서 기능이 바뀌고 용도가 새롭게 부여되어도 그 건축은 여전히 처음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기능적 기술적 보완과 내용은 꾸준히 반영되고 개선되고 있다. 정말 포화상태에 이르면 새로운 부지에 새롭게 건축한다. 또는 리모델링 또는 리노베이션이라는 형식으로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면서 수명을 연장하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경제성이라는 관점은 더 큰 명분 또는 주제에 따라 2순위 또는 3순위 판단요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한 번의 일을 잘하는 것이 깔끔한 업무처리임은 당연하다. 굳이 여지를 두면서 완벽한 마무리가 아니라면 어떤 면에서는 비효율이고 낭비인 것이다. 자 그런 관점에서 우리의 공공건축은 어떤 문제가 있고, 그 문제가 어떻게 한국건축의 생장 또는 성장을 방해했는가?


세계적 건축의 면모를 보면 건축적 모험과 도전, 건축에 집중된 표현과 의지가 드러난다. 그리고 대체로 그 시대, 그 사회에서 여러 가지 가치와 도전, 현상과 해석, 관찰과 사유가 드러난다. 사실 가난하고 척박하고 열악했던 6,70년대 국가나 기관이 주도한 공공건축들을 보면 놀라운 성과를 보여주었다. 설령 그것이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었을지라도 말이다.


김수근의 부여박물관 왜색 논쟁은 처음으로 우리 사회 언론에서 건축의 양식, 즉 스타일에 대한 언급이었다. 물론 다분히 감정적 시각이었으나 식민지 상처를 드러낸 것이니 이해할만하다. 거의 건축 주류에서 다루지 않았지만 매우 키치적이고 흥미로운 강봉진의 국립민속박물관의 준공은 놀라울 따름이다. 링컨 센터를 모방했다고 하지만 디테일과 형식에서 도전을 보여준 이희태의 국립극장. 피상적 감상으로 링컨센터언급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역 정체성을 심도 깊게 고민한 이희태의 고심이 보인다. 사실 김수근이나 김중업보다 일련의 이희태 작품을 보면 가장 치열한 지역성에 대한 고민을 한 건축사임을 알 수 있다. 가장 열악한 환경과 시대에 건축된 일련의 공공건축은 분명 재조명될 가치와 의미가 있다.


문제는 이런 노력과 시도들이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는 90년대 이후 희미해지고, 생산형 건축으로 공공건축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산업과 행정의 대상으로 다뤄지면서 사유와 철학이 사라졌다. 그것은 건축의 디테일과 세부구성에서 드러난다. 그나마 8,90년대는 6,70년대의 작가주의적 속성이 남아있었지만 2000년대 이후는 사라졌다. 2000년대 이후의 공공건축 상당수는 생산적 시각이지 미학적 관점의 사유와 구성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물론 양적 증가로 인해 여전히 존재하는 건축적 본질과 입장에서 출발한 것들이 있지만 전반적 구성이 그렇다. 가장 공공건축의 무가치성은 고속철도 역사들이다. 그냥 거대한 유리와 철구조물일 뿐이다. 철도시설이고 기능 운은하지만 신국범의 김포공항처럼 곡선의 와플구조를 실현한 모험이 선택되지 않는다. 기술도 자본도 압도적인 후대의 기능건축은 미학적 요소가 사라졌는가?


그렇지 않다. 테리파렐이 디자인한 인천공항의 교통센터나 자하하디드의 동대문 DDP는 누가 봐도 한눈에 건축가를 알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작가주의적 건축, 즉 정체성이 드러나는 건축은 해외건축가들에게만 허용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31살의 김운해 건축가가 디자인한 김포공항의 ‘조국에드리는 탑’처럼 조형을 하는 건축도 사라져 버렸다.


결국 오늘의 한국 공공건축 문제는 국내건축가들에게만 정체성 드러나는, 건축적 본질과 가치가 있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니 물밑 로비니 안면 로비니, 각종 연줄이 동원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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