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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길 Feb 09. 2024

1.2 한국 건축은 죽었다.

한국건축은 스스로 인정을 못한다. 차라리 수입이 더 쉽다.

한국건축은 한국 스스로 인정을 못한다. 차라리 수입이 더 쉽다.


일을 하면서 의외로 많이 들었던 말이 서투르면 베끼라는 요구였다. 90년대 후반 발주처 임원과 대화에서 들은 말이다. 이후 발주하는 입장의 사람들과 여러 기회가 있을 때 이런 유사 발언을 무수히 들었다.

그들이 모두 건축을 전공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건축을 전공한 이들도 이런 표현을 사용했다.

뭐… 책을 읽다 보면 다른 나라에서도 했던 것 같다. 19세기말 서구화에 열중하던 일본 관료들이 제국호텔 건축가에게 요구한 것이 베껴달라는 것이었으니… 백 년 넘어 그런 발언이 우리나라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90년대 이전에는 해외 건축가의 작품이 국내에 설계가 진행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외화 절약도 있었지만, 건축계 내부에서도 그런 필요성이나 요구가 없었다. 아주 기능적인 첨단 시설 경우도 기술과 기능 중심의 요구였다.


지나친 속도는 때로 질적인 부분을 간과할 수 있다.  우리나라 건축이 바로 이런 사례다. 사회가 워낙 빠르게 변하는 과정에서 건설이 주도한 나리라 건물을 지을 때 건축사를 만나서 설계를 먼저 하는 것을 모른다. 이런 이유로 건축설계를 건축사가 하는 독립적 행위라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더욱 놀라운 것은 공공건축을 집행하는 공무원들도 그렇다. 건축에 대해 상당히 열악한 인식이다. 대중과 접점도 어려웠던 것이 보통의 일반인들이 건축을 진행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가난할 때는 집 지을 기회가 없으니 건축사가 누구인지도 몰랐고, 이제는 아파트에 사니 역시 건축사를 알 필요가 없다. 그냥 대형 건설사 이름으로 분양하고 건설하니 그런가 보다 하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자기 사는 아파트를 누가 설계했는지 왜 궁금할까? 다 똑같은데....

물론 전부 아파트만 짓는 것이 아니니 통상의 건축은 건축사를 만나면서 시작한다. 가뭄에 콩 나듯 개별적으로 건축을 의뢰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극히 일부였고,  전형적 변방 심리로 건축사들에게 해외의 어떤 것 닮기를 요구했다. 단지 돈이 없을 뿐 가오가 없는 것도 아닌데 남대문 도깨비 시장의 밀수된 미국 상품 위조품 같은 것을 요구했다.


그래도 위안이 될 만한 부분이 있다. 건축 위조품은 사실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세계 건축사에도 이런 사례는 무수히 많다. 데스틸(De stijl)이라는 근대 미술사조는 여러 가지 출발점 중 시각적 흉내내기가 하나였다. 수직수평의 기하학적 구성으로 평면의 유기적 공간을 표현해 낸 미국 건축가 프랭크로이드 라이트의 흉내내기였다. 그의 공간개념인 유기적 관계에 의한 평면개념은 알려지지 않은 채 시각적 요소만 알려졌고, 유럽인에겐 새로운 자극제가 되었다. 여기에 깊은 인상을 받은 몇몇 예술가들은 나름의 해석으로 독자적인 그림이나 디자인을 발표한 것이 신 조형주의라 할 수 있는 데스틸이었다. 문화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발상이 시작되는데, 딱 이런 개념의 넘나들기가 19세기말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 뜸을 들이냐면 우리나라 건축이 척박한 환경에서 5,60년대 잡지나 책을 보고 서구 건축을 동경했었고, 이를 나름의 해석으로 도전했었던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1945년 이후 한국 건축이 본격적으로 시작했으나, 근현대건축에 대한 학습의 시간 없이 생산과정에 돌입해야 했다. 당연히 좌충우돌의 실수와 서투름이 가득했고, 나름의 해석으로 흉내 낸 건축들이 많았다.

건축은 실현의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변수들이 작용하고 결과 또한 예측이 어렵다. 규모가 클수록 더욱 그러하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논쟁과 토론을 유발되기도 한다. 데스틸처럼 성숙된 결과를 만들기도 하지만 전혀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 50년 전쟁을 지나 60년 419와 516의 국가가 체질적으로 변화하는 터닝포인트들을 겪으면서 건축도 소용돌이쳤다 아쉬운 점은 시대의 변화에 휩쓸려 건축이 자체적인 담론이나 화두를 던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건축들은 서서히 한국이라는 국가적 정체성과 맞물리며 새로운 성과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6,70년대 국가 주도의 공공 건축 프로젝트들이 그러하다. 깊이 있는 건축설계 교육을 진행한 대학도 부족했지만, 일선의 몇몇 건축사들은 지금 봐도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 스스로 이룬 결과에 자부심이 없었다. 그나마 공간이라는 매체를 만들고 팀호흡으로 동고동락을 한 김수근 정도 후배와 후학들에 의해 꾸준히 사회에 발언한 덕에 인정받는 몇 안 되는 한국 건축가이다.


동시에 이런 상황에서 우리 스스로도 문제를 만들었다. 그것은 한국을 바탕으로 활동한 건축가들에 대해서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1960년대 몇 안 되는 작가주의 건축가들은 나름대로 영역이 있었고, 창작의 기회가 있었다. 실제로 많은 건축 작품들을 만들어 냈다. 문제는 이들에 대한 스스로의 인정이 부족했다. 전문가 집단에서 인정 부족은 자연스럽게 외부에서도 인정하지 못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억지로라도 만들었어야 하는 자생적 분위기를 확보하지 못한 것이다. 척박한 외부 인식과 내부의 불인정이 부정적 인식을 지속하게 만들어서 결국 국내에서 공부하고 자립한 건축적 노력들이 폄하되었다.


추가해서 잡지로 소개되는 해외 건축에 대한 열망은 70년대 막연한 서구 동경처럼 강렬한 워너비 마음을 가지게 했다. 80년대 후반 90년대부터 본격적인 해외 유학이 시작되었고, 2000년대 들어 유학한 건축가들이 속속들이 귀국했고, 이들이 국내 대학의 교편을 장악했다. 문제는 이들의 귀국도 "한국적" 건축을 형성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어떤 면에서는 6,70년대 강렬한 열망으로 응용된 카피캣으로 독특했던 디자인조차 사라져 버렸다. 해외잡지나 최신 유행을 따라한 건축이 2000년대 건축매거진을 도배했다. 이 글을 읽는 이들 중에 건축학도나 건축계 종사자가 있다면 잡지에 등장하는 건축가들의 이름을 지우고 작가 찾기를 해보길 권한다. 작가적 독자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대형 건축사사무소들의 작품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풍토를 일반인들은 모를까? 당연히 안다.


덕분에 2020년대 중반의 한국 건축은 정부나 지자체, 민간 모두 할 것 없이 세계적 건축잡지를 도배하는 최신 뜨는 건축가들을 찾아 나서고 있다. 90년대 중반 이후 두 번째 수입건축 유입이다. 90년대와 차이가 있다면 그래도 건설에 비용을 투입해서 완성도를 확보하는 점이 긍정적이다. 이런 현재를 건축계 인사들이 불만과 문제를 토로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스스로 책임도 없다 할 수 있을까?


스스로 독자적 건축관과 보편적 인류애적 사회의식 없는 건축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프리츠커는 고사하고 앞으로도 "건축가 수입"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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