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한국 건축은 죽었다.

영혼 없는 건물이 지배

by 홍진

인간은 기본적으로 필요가 해소되면 감정적 요구를 하게 된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도 있고,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이 있다. 인간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를 말하고 있다.


아름다움에 대한 인정과 평가는 문화와 학습, 경험에 따라 각자 다르게 인정할 수 있지만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모두의 감정이다.


도시에서 건축은 이런 감정의 대상이다. 그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동일하다. 우리라고 다를까? 유튜브로 만나게 되는 백 년 전 우리나라 풍경을 보면 기와지붕 넘실대는 지붕선들이 매우 매력적이다. 당시 조선을 방문했던 선교사들의 기록에도 이런 내용들이 나온다.

초가집 가득한 시골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비록 거칠고 투박해도 진흙벽을 발라 말리고 회로 칠한 벽면에는 기와나 옹기조각으로 멋을 내고 모양을 만들었다. 마당을 바라보며 걸터앉을 툇마루 조각도 그렇고 작은 창호지 문고리 하나도 세심하게 모양을 내었다.

초가집이 이럴 진대 기와집은 어떨까? 지붕의 막새부터 지붕선에 이르기까지 디테일과 전체 외형은 하나의 방향을 향해 매력적으로 구성된다.


전통공간의 공예적이고 아기자기함은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르지만, 단지 기능으로만 만들어진 건축이 아니었고, 그런 건축으로 구성된 마을이 아니었다. 참 아쉽게도 이런 과거의 흐름과 수공예적 표현들이 산업화되는 과정에서 소멸되고 버려졌다.


잉여자산으로 '부동산'의 투자가치로 매매되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그렇듯 산업화 이후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든 사업이 그렇듯 원가 저렴하고 이익이 안정적으로 확보되는 결과가 있다면 누구나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다만 그 변화는 매우 느리고, 기존 도시의 구성과 타협하거나 눈치를 보게 되어 있다. 단기적 이익에 충실한 장사꾼이라면 이런 손쉬운 선택을 왜 마다하지 않겠는가?


문제는 익숙한 것에 대해서만 고객이 팔아준다는 것이다. 건축 또한 마찬가지다. 유럽인들에게 익숙한 건축은 섬세하게 장식된 고전적 건축이었다. 모더니즘의 기하학적 건축이 대 유행을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익숙한 장식이 치장된 "이쁜"집에 꽂혔다. 장사꾼들 입장에서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다. 여전히 장식으로 치장하고 익숙한 것들로 만들어야 했다.


이런 전통에 대응하려면 현대적 건축을 지향하는 건축가들 입장에서는 집요하게 디자인을 구성해야 했다. 비례나 구성, 재료의 철학적 가치나 예술성 등등의 지식을 총동원해서 미학적 설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경쟁의 존재가 너무 강력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유럽에 대한 모태신앙을 가진 미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만 한 다리 건너 천리라고 대서양을 건너고, 광활한 미국 대륙을 건너다보니 좀 더 새로운 '미학'을 인정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덕분에 장사꾼들은 좀 더 숨을 쉴 수 있었다.

현대 건축가들의 작품을 보니 언 듯 흉내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더구나 급증하는 인구로 건축은 공급이 부족하다 보니 사람들이 선택 조건에서 아름다움은 후순위로 밀리기 시작했다.


이런 환경이 태평양을 건너 우리나라 와서는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일본에 의한 식민지 경험은 무조건적인 서구적 고전에 대한 식민적 거부감이 존재했다. 그렇다고 몰락한 조선의 건축 양식은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얼마나 못났으면 왜국에 점령당한 것 아닌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전쟁으로 초토화되었다.

이젠 눈의 호사는 말도 안 되는 사치였다. 그냥 비피하고 눈피하고 더위 피하는 말 그대로 '피난할 공간'으로 건축이면 되었다. 이틈을 장사꾼들은 놓치지 않았다.


한국 전쟁 이후 거의 5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건축의 아름다움을 대중화하는 건 불가능했다. 덕분에 원가 절감의 건축은 전국 곳곳에 쉽게 만들어졌고, 각종 정부 정책 역시 이런 흐름을 방치하고 있었다. 물론 한두 개 국가적 건축은 그래도 창피하니 나름 멋을 부렸다. 이 과정에서 전문가들은 뒤편으로 밀려났다. 무슨 말이 그리 많은가? 대장이 좋다면 좋은 거지.... 전문가 나부랭이는 말 그대로 업자로 취급했다.


세월이 흘러 교육열이라면 세계 최고의 나라에서 건축을 교육받은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들이 늘어날수록 우리 도시와 건축에 대한 불평불만이 늘어났다. 그리고 그들이 앞장서서 설득하고 있다. 노력이 꽃피우나 했는데, 다시 산업화와 생산성, 그리고 수익성이 건축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대박 치는 돈을 벌어주는 집들이 등장한 것이다. 어느 누가 이런 일확천금의 기회를 놓칠까?


건축가들의 마을에 가면 이런 현실에 대한 성토가 매일 올라오고 있다. 하지만 5천만 대한민국 국민 중에 누적 건축사는 26,000명이다. 고인이 된 건축사를 빼고 활동하는 건축사와 대학교수나 유사 공부하는 이들 다 합쳐도 2~3만 명 수준 일 것이다. 이들 모두가 건축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시장도 공급자도 이를 만드는 이들도 상당수가 관심 없는 사이에 수익성 좋은 건물은 오늘도 여전히 전국에 만들어지고 있다. 자세히 보면 아름다움, 미학에서 출발한 건물은 정말 몇 개 안 된다.

그러면 어떤 이유로 건물이 디자인되는 것일까? 흥미롭게 대한민국의 건축 법령이다.

계단 높이, 난간 높이, 지붕선, 재료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많은 요소들이 법으로 규정되어 있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촘촘하게 건축 관련 법들이 있는 나라다. 법으로도 충분히 건물이 디자인되고 만들어진다. 이쁘고 안 이쁘고는 그다음이다.


아주 극소수의 건축사들이 투쟁하듯 이런 법들의 틈을 찾아내서 디자인하고 있다. 한국 건축사들의 수준이 폄하되고 있다.


덕분에 우리나라의 일반 오피니언리더들은 합판으로 아파트 짓는 미국 건축가들이나 단열 안 되는 벽으로 디자인하는 일본 건축가들이나 건축규제 약한 유럽의 건축가들의 자유분방한 건축을 부러워한다. 한술 더 떠 정치인들은 아예 그들을 만나서 모든 조건을 풀어주고 맘껏 디자인하라 한다.


물론 돈도 우리나라 건축가들의 열 배는 준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고의 건축가들을 그들의 수하로 넣어준다. 이른바 인허가와 실시설계권이라는 쌈짓돈을 쥐어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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