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은 아름다운가? 아름다워야 하는가?
대한민국에서 창작하는 건축사는 온갖 스트레스에 쌓여있다. 창작 않는 건축사가 있을까만은… 오죽하면 작가주의 건축사라는 표현이 있을까? 이는 작가주의 화가, 작가주의 작곡가라는 이상한 표현이다. 그럼에도 작가주의 건축사라는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대부분의 국가에 이런 표현을 쓴다면 다들 황당해할 만하다.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선 건축사는 당연히 창작하는 전문가다. 작가주의라는 표현이 맞지 않는 이유는 건축사 자체가 주관적 시각으로 창작하는 전문가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무슨 홍길동 대사도 아니고, 창작하는데 창작하는 이라 설명해야 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한국에서 건축사들은 이런 창작가로서 인정에 박하다. 스스로가 아닌 타인들의 인정이 그렇다. 아쉬운 점은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길을 간다 해도 이런 주변의 평가는 사람을 많이 위축시킨다. 위축된 상황에서 창작은 더 고통스러워진다. 그리고 완벽하지 못함(?)에 몇 가지 태도가 나온다. 타인의 평가에 지나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방어 기제가 작동한다. 반대로 누구의 평가도 무시한 독고다이 My way가 되기도 한다. 가금 드물게 타인의 인정을 받아 소위 네임드 건축가로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 또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맘대로 해... 난 먹고사는데만 관심 있어. 너나 작가 해라라고 하지만 그런 발언은 마음 저편에 상처에서 나온 말이다.
수십 년 건축을 하면서 정말 다양한 건축사들을 보는데, 마음이 많이 아픈 이유는 이런 감정을 토로하는 건축사들, 상당수가 한 때 열정적이었던 사람인 경우가 많다. 아쉽게도 대학을 졸업하고 나오면서부터 타인으로부터 받는 지적질과 평가에 마음이 닫히는 경우가 많다.
건축을 실천하고 시장 생존하는 과정에서 멘털관리가 될 필요가 있다. 사실 이 글을 처음 쓸 때는 이런 위로의 방향이 아니었으니 첫 글 첫 문장으로 돌아가서 "창작"으로 건축을 언급해 보자.
건축은 누가 뭐래도 창작이고, 건축사의 내면 깊숙이 잠재된 예술혼이 솟아난 것이다.
나도 사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건축설계 산업 언저리에 있는 이들로부터 건축이 무슨 창작? 무슨 예술? 글쎄다... 예술 또는 창작을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보느냐가 아닐까? 솔직히 이 연사 강력히 주장하는데, 건축은 그 자체가 미학적 대상이고 사유적 대상이고 창작의 결과다! 연재글의 시작 글 중 하나에서 인간의 미적 욕구와 대상으로 건축을 언급했다. 물론 철저한 기능과 용도에 집중한 건물이 있어 미적 표현의 존재가 없을 수도 있지만, 신기한 것이 그런 건물을 바라보는 사람이 나름의 아름다움을 찾아낸다는 점이다. 거대한 플랜트의 철골과 수많은 배관들의 얽힘을 보면서 매력을 느끼고 이를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세상의 모든 것이 미적 대상이고, 이를 만들어내는 모든 이들은 창작가다. 당연히 건축을 발상하고, 표현하고, 현실화로 계획하는 건축사는 창작가다. 건축은 창작이고, 미적 대상이니 예술이다. 주장이 과한가?
물론 다수의 건축은 생존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법과 불법 사이에 존재한다. 어느 나라나 그렇다. 우리가 늘 언급하는 문화나라 프랑스도 다녀보면 은근슬쩍 불법건축이 스멀스멀 있었음을 알게 된다. 미국은 안 그럴까? 과거의 그들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걸리면 부숴야 하는 살벌함이 억제하고 있을 뿐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저런 이유로 그들의 도시 또한 최소한의 가치로 건축되는 것이 다수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 그들이나…. 그럼에도 왠지 이뻐 보이는 것은 역사라는 과거 속에 현재가 의지하고 있고, 그 과거는 수공예가 중심을 가져갔기 때문이다.
덕분에 어부지리로 이쁘다!
아쉽게도 이런 다수의 생존건축에서 우리는 수공예가 없어지던 시절 만들어졌다. 사실 이 시기의 딴 나라도 마찬가지다. 생산과 산업과 만나면서 마구잡이 건축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안 이쁘다. 그들의 한탄과 글에도 이런 내용은 나온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아름다운 건축을 포기한 것일까?
그럴까? 놀라운 것은 생존건축에도 나름의 소박한 예술적 로망이 있다. 사라져 가는 달동네를 가보면 손잡이, 담벼락, 처마선 등에 이쁘려고 하는 흔적을 만나게 된다. 아!! 얼마나 그 노력이 가상한가? 조금이라도 이쁘고 싶어 하는 정성과 노력! 그러니 돈을 조금 더 쓸 때 안 이쁘게 할까? 당연히 노력하는데 문제는 제눈에 안경이라는 것이다. 이 또한 학습과 경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성장하고 있다. 이렇게 작게라도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것은 딴 나라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이런 생존 건축보다 조금 올라간, 돈이 들어간 건축에서 문제가 생긴다. 앞의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나라는 이 단계에서 손을 놓는다. 법이 모든 것을 만들어낸다. 심지어 서울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에 우뚝 서 있는 건물에서도 디자인 또는 미학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건물이 떡 하니 서는 경우가 많다. 한마디로 이쁨을 포기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건물의 상당수를 보면 건물주의 의지가 확고부동하다. 법이 정한 것 아니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왜 건물이 이뻐야 하냐며 건축사를 힐난하고 밀어붙인다.
그런 풍토로 약 70년이 넘게 온 것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포기할 수 없다. 이쁨을... 왜냐면, 아름답다는 것은 단지 눈이 호사스러운 것 이상의 의미가 가치가 있다. 도시에서 건축차지하는 의미와 기능은 정신에 영향을 주고 문화가 되고 삶을 만든다. 건축사는 그 과정에서 실현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건축은 아름다워져야 하고, 아름답고, 아름다울 수 있다. 우리 삶을 형성하고 만들어내는 배경이기 때문이다. 포기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