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는 적응과 10년 주기 리셋: 해외에서 살아간다는 것
그 도시는 나에게 낯설지 않았다. 몇 번이고 스쳐 지나갔던 거리였고, 어느 계절에 머물렀든 늘 익숙한 풍경이 조용히 반겨주던 곳이었다. 오래전 기억 속에 흐릿하게 남아 있던 장면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다시 눈앞에 펼쳐졌다.
하지만 그날 따라, 이상하리만치 감각이 선명하게 살아 있었다.
지도를 펴지도 않고, 누구와 약속도 하지 않은 채 혼자 천천히 걷던 오후였다. 방향 없이 걸어가는 그 시간 속에서,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어떤 감정들이 조용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빛이 벽면을 타고 내려와 한 점에 모이고, 불완전한 구조물의 틈으로 스며든 어둠이 독특한 균형을 만들고, 인적 없는 골목길의 끝에서 반사광이 바닥을 가만히 훑고 지나갔다.
그 모든 장면은 특별한 건 없었지만, 오히려 너무 평범하고 아무렇지 않아서 더 강하게 다가왔다.
이건 찍어둬야겠다는 생각도, 뭘 남겨야겠다는 계획도 없었다. 그저 순간적으로 일어난 기록 충동이었다.
하지만 그 충동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여행자의 들뜬 감정이 아니었고, 꽤 오랫동안 멈춰 있던 내 감각의 회로가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조용한 신호처럼 느껴졌다.
그날 이후, 사진은 더 이상 어떤 장면을 저장하는 기술이 아니라, 무뎌져 있던 감각을 하나씩 되살리는 통로가 되었고, 마음 한가운데에 놓인 단단한 구조물처럼 나를 중심에 단단히 묶어주는 역할을 해주었다.
그 안에서 나는 아주 오랜만에,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한때의 작업들은 지금 떠올려보면 너무 빠르게 흘렀다.
정해진 마감과 외부의 기대, 설명할 수 없는 압박 속에서 나는 내 감정을 미루고 흐름을 놓친 채 움직이곤 했다.
그 시간들을 지나오고 나서야 조금씩 달라진 감각이 찾아왔다.
더 이상 누군가의 리듬에 나를 맞출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처음엔 낯설었지만 이내 고요한 안도를 남겼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의미를 억지로 만들어내지 않아도 되는 거리.
그제야 비로소 외부가 아닌 내 안을 향한 감각이 돌아왔고, 이제는 어떤 결과보다 내가 마주한 이 장면이 지금 어떤 울림을 남기는지가 더 중요하다.
사진은 여전히 기록이지만 이제는 타인을 향한 설명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한 대화로 남겨두고 싶다.
어쩌면 나는 지금 누군가의 시간에서 빠져나와 다시 나만의 속도로 걸어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 리듬은 느리지만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사람들은 종종 완전히 다른 길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나에게 그 물음의 답은 새로운 방향이 아니라 예전부터 꾸준히 바라보고 있던 것 안에서 찾아졌다.
정해진 언어도 없고, 누구의 기준에도 맞추지 않았던 사진들, 그저 ‘지금 이 장면이 좋다’는 이유 하나로 찍어두었던 이미지들이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유효했다.
그건 단순한 취향이 아니었다.
내가 일관되게 반응하고 있었고, 꾸준히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가능성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낯선 도시든, 일상이든, 어떤 환경에서도 ‘지속적으로 무엇에 반응하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 질문이야말로 나를 다음 가능성으로 데려다주는 진짜 연결선이었다.
한때는 이 작업의 의미를 말로 증명해야만 했다.
왜 이걸 하는지, 어떤 효용이 있는지, 어디에 써먹을 수 있는지를 묻는 말들 앞에서 자주 주춤했고, 때로는 스스로도 의심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말이 필요하지 않다.
누구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괜찮고, 해석되지 않아도 좋다.
내가 계속 만든다는 사실, 그 감각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진은 더 이상 결과물이 아닌, 감정을 기록하는 방식이고, 혼란 속에서도 나를 붙잡아주는 중심점이다.
어떤 날은 리듬이 느려지고, 어떤 날은 감각이 둔해져도, 나는 그 속도를 믿기로 했다.
해외에서의 리셋이란 결국 대단한 기획보다 조용한 감정에서 시작되고, 누구와 함께하기보다 나 혼자 아주 조용히 감각을 되찾는 일이기도 하니까.
지금의 나는 버텨내는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관찰하는 사람이고 싶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사람만이 끝까지 살아남는다는 걸 — 지금은 정말 그렇게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