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의 습작
2012.07.29
며칠 전, 집으로 소포가 배달됐다. 작지만 꽤 무거운 네모난 상자였다. 발송지가 표시되지 않은 붉은색 소포.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차마 바로 열어볼 엄두가 안나 그냥 버릴까 하다가 맨 밑 서랍장에 넣어 두었다.
누가 어떤 의도로 보냈을까 병적으로 머리를 쥐어 짜내며 생각해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머리 안쪽에서 누군가 작은 막대기로 쿡쿡 찌르는 것처럼 머리만 쑤셔올 뿐이었다. 결국,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길을 건너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멈춰섰다.
한달 반 전, 내가 이 곳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그 덕분에 그 이전의 기억이 모두 사라졌다. 불행일까 행운일까?
빨간 불 신호등이 녹색으로 변하기를 기다리는데 붉은 색이 따가운 태양 빛에 반사되어 빛나면서 문득 그날 받은 붉은 소포가 생각났다.
돌아오는 길, 내가 좋아하는 토마토 쥬스를 사들고 오늘은 집에 가서 꼭 열어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하나, 둘, 셋 깊게 심호흡을 했다.
아무일도 없을 거라고..별 것 아닐 것이라고 마음을 타일렀다.
그리고 눈을 감고 밀봉된 테이프를 쫘악 뜯었다. 좀처럼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거의 30분이 지나서야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소포를 열었다. 그 안에는 편지와 빛나는 물건이 들어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 보자 그것이 반지임을 알았다. 아주 귀여운 디자인의 하트모양 큐빅이 박힌 반지였다. 그리고 붉은 소포와 마찬가지의 붉은 봉투에 들어 있는 편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눈에서 반지에 박힌 큐빅같은 물방울들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수영이에게
나야, 규원이. 누군지 모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만..
학교 친구에게 너가 교통사고났다는 얘기를 들었어. 그동안 너와 나 사이에 있던 일들을
말해 줄수도 있지만, 그냥 하지 않을게. 너의 건강을 위해서도 그러는 편이 낫겠어.
이 반지 기억나? 이거 너가 많이 아끼던 반지야. 앞으로 소중히 잘 간직했다가
너가 정말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주길 바래.
건강하게 완쾌하길 빌게.
혹시라도 기억이 돌아오면..난 찾지말아줘. 한국에는 없을테니까.
그럼 잘 지내!
규원이..그 이름을 듣는 순간 모든 기억이 꿈이 현실에 펼쳐지듯 또렷하게 되살아 났다.
3학년 9반 임규원..내가 고등학교 3학년때부터 5년 간 짝사랑하던 아이다. 10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없다고, 좋아한다고 딱 10번 고백했었다. 그리고 그 10번 째 고백한 그날..교통사고가 났다. 바보같이 얼마나 울었으면 부은 눈으로 신호등 불빛도 제대로 못보고 건너다가 그렇게 사고가 난 것이다.
내가 그 아이를 좋아한 건 나도 모르게 끌렸을 뿐이다. 그 아이의 모든 것이 좋았다. 공부할 때 늘 인상쓰는 표정도, 눈을 감고 생각하는 모습도, 웃을 때 드러나는 귀여운 덧니도, 자신은 커서 유명한 작곡가가 될 거라고 말하던 자신감과 열정도 너무 좋았다. 약간 곱슬거리는 갈색빛이 감도는 머리카락과 짙은 눈썹. 친구들과 있을 때는 항상 즐거운 듯이 있다가도 혼자가 되면 진지하게 일을 하는 모습도 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좋아하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다.
학교에서 급식을 잘못 먹었는지 심하게 배탈이 난 적이 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엎드려 있는 나에게 그 아이가 걱정스러운 듯이 다가왔다. " 수영아, 너 어디 아픈 거 아냐? 조퇴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응, 나 배탈났나봐. 배가 너무 아파."
"잠깐만.." 하더니 자신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건냈다. 소화제였다. 히죽거리며 그 아이는 말했다. "나도 음식 잘못먹어서 배탈난 적이 있어서 항상 비상약으로 가지고 다니거든. 이거 너 줄게. 일단 이거 마시고 조퇴해." "아...고마워, 규원아."
그전까지는 그 아이에 대해 잘 몰랐지만 이날 이후로 난 그 아이를 유심히 보게 됐고, 점점 빠져들게 됐다.
하지만 고백하면 늘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대체 내가 왜 싫은데! 너 여자친구 있어?"
"아니.."
"그럼, 왜! 좋아하는 애 있어?"
"아니.."
"그럼 뭐야, 설마..너 남자 좋아하니?"
"아니야! 그런거."
"그럼 왜 그런건데, 나한테 그때 왜 잘해줬어! 그러지 말지."
"난..그냥. 걱정돼서"
"너무해! 오늘로 너가 나 6번 째 차는 거 아니?"
"응..미안..하지만 난 널 그냥 친구로 생각해."
난 이렇게 규원이와 친구 사이로 잘 지내다가도 고백하면 늘 차이고 펑펑 울었다. 바보같은 자식. 나쁜 자식. 하지만 안다. 사람 마음이 억지로 떼쓴다고 되는 건 아니란 것을. 그래도 난 하는데까지 해보고 싶었다. 좋아하지 않아도 한 번 사귀어 보면 안되는 건가. 상처받아도 난 견뎌낼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여자애를 사귀는 법도 없었다.
10번째 고백하던 날, 이 때는 우린 대학교 4학년 이었다. 세월은 금세 지나갔고, 우린 취업이라는 관문에 고민하며 시달리고 있을 때였다. 내 인생 목표는 카페를 경영하는 것과 규원이 이 두가지 뿐이었다. 그동안 잡다한 아르바이트와 과외를 하면서 번 돈을 저축해서 카페를 차릴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그동안 꿈꿔온 아늑하고 편안한 그런 달콤한 휴식에 딱 들어맞는 카페였다. 카페에 내가 좋아하는 귀엽고 아기자기한 각종 악세사리와 소품, 찻잔, 책, 피아노, CD등을 놓고 주말에는 근처 피아노학원에서 아이들이 피아노 경연대회를 열 수 있는 이벤트 공간도 준비했다. 자유롭고,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디자인과 책들 때문인지 단골손님도 늘어났다. 그렇다고 커피나 음료, 다과의 맛이 뒤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특히 우리 카페에서 파는 전매특허품인 딸기케잌과 밀크스무디의 맛은 최고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이기도 하다.
그날도 난 운영이 끝난 뒤 카페에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있었다. 사실 책에 있는 글자들이 공중으로 사라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규원이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 점점 다와가기때문이었다. 오늘은 제발 받아주기를, 받아줄 것이라는 기대감과 설레임, 그리고 불안감과 걱정으로 범벅된 복합적인 감정들로 인해 심장이 요동쳤다.
규원이도 이제 2년 간 뉴욕의 전문 대학교에서 작곡가 과정을 마치고 돌아왔기때문에 한 숨 돌리고 있던 때라 더욱 기대감이 컸다.
눈과 귀, 코 모든 감각이 발달해 있는 것 같았다. 멀리서 들리는 발소리에도 심장이 콩닥콩닥했다.
그리고 드디어 카페 문이 열리며 내가 좋아하는 검정색 가디건을 걸친 규원이가 왔다.
" 규원아.. 왔어? 정말 오랜만이다. 그치?"
"응, 그동안 잘지냈지? 카페 너무 예쁘다. 꼭 너같아."
"정말? 고마워. 나 너가 얼마나 보고싶었는지 몰라!"
"키키, 꼭 너처럼 어지럽고 귀엽네."
"뭐야, 뭐 마실래?"
"응, 커피"
"오케이, 맞다. 너 지금 곡 쓰고 있다던데 어때? 잘 돼가?"
"그냥 그래, 열심히 작업중이야."
"넌 분명 잘 될거야."
커피를 만들어 가져다 주고, 마주보고 앉았을 때, 다시금 느꼈다. 난 규원이를 정말 열렬히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커피를 마시던 규원이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
"너 아직도 나 좋아해?"
"응. 당연하지. 난 지금도 널 보면 심장이 두근거린다니까."
"바보..왜 날 좋아해?"
"야, 좋아하는데 이유가 어딨어, 그냥 너 모든 게 다 좋아."
"난..너가 좋아할만한 사람이 아냐."
"무슨 말이야. 너가 얼마나 매력있는데."
"미안해, 역시 난 너의 마음을 받아줄 수가 없어."
"뭐야. 또 그 소리야. 이유가 뭔데. 도대체!"
"나 갈게, 커피 잘 마셨어. 나 그리고 며칠 뒤에 다시 외국에 나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 기다리지말고."
"뭐야? 왜그래 대체! 나때문에 가는거야? 그런거면 가지마."
"너때문에 가는 거 아니야. 나중에 연락할게."
"잠깐만! 그럼 이거..가져가. 내 반지. 나라고 생각하고 간직해줘."
"됐어, 내가 왜 이걸 받아."
"친구로서 주는거야. 나 잊지말라고."
"알았어..고마워. 잘있어."
"나쁜놈..너도 혼자서 잘 먹고 잘 살아라!"
그게 마지막이었다. 규원이를 본 게..그리고 약속대로 이 편지를 보낸거다. 끝까지 약속 하나는 잘 지키는 더 나쁜놈.
근데 반지는 왜 다시 돌려준거야. 이 매정한 자식이..
그리고 기억이 돌아오고 1년 뒤, 스승의 날. 고3때 담임선생님을 찾아갔을 때 알았다. 규원이는 불치병에 걸려서 나에게 편지를 쓴 다음날 죽었다고 했다. 미국에 갔던 것도 사실은 불치병을 치료하기 위해 갔던 것이라고 했다. 유독 머리색과 눈동자 색이 갈색이었던 것도 불치병의 한 증상으로 색소결핍증이 일어나서 그랬던 것이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믿을 수 없어서 몇 분간은 할 말을 잃은 채 서 있었다. 그리고 거의 3시간 동안 담임선생님 품에 안겨서 울었다고 한다. 지금도 난 규원이가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규원이에게 11번 째 고백을 할 것이다.
지금에서야 알았지만 붉은색 소포와 붉은색 편지봉투 모두 그가 내게 보낸 적색신호였다.
병이 악화되면서 붉은색이 흰색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내게 더이상 자신을 사랑하지말라는 의미의 빨간 신호등이었던 것이다.
오늘 나는 규원이의 묘를 찾았다. 그가 좋아하던 백합꽃을 들고..
"흰 색 백합은 너무 예쁜 것 같아. 순수해서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거든."
"흰 색 백합도 시들면 색이 변하는데?"
"시들지 않게 잘 가꾸면 돼지."
"어떻게?"
"이렇게.."
하고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었다. 그땐 그 의미를 잘 몰랐지만 지금은 알 수 있었다. 그도 날 사랑했다는 것을..
'규원아, 잘 있지? 그 곳에서 멋진 곡을 작곡해서 들려 주고 있을 거라 믿어. 너라면 분명 하늘나라 최고의 작곡가가 됐을거야. 너의 곡에 모든 이들이 즐거워하고 있겠지? 나도 하늘나라 음악회에 가고 싶다. 오늘 11번 째 고백을 할거야. 널 만나면 그때 하려고 했는데 안되겠어. 나 널 지금도 너무 너무 사랑해. 내 마음 받아줄래?'
그리고 돌아오는 길, 신호등 앞에 서자마자 규원이가 대답이라도 하듯 녹색 신호등이 켜졌다. 난 신호등을 건너면서 미친 사람처럼 활짝 웃으며 하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