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전 한 개로 시작된 인연, 아마도.
"그 동전 하나, 제가 드릴게요!"
로마 트레비 분수를 등진채로, 왼쪽 어깨너머로 동전 세 개를 던지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미신이 있다. 10년 전 겨울, 그녀에겐 간절한 소원이 하나 있었다. 여러 번의 취업 실패를 겪은 후 심신이 지쳐 떠나온 여행이었기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쏟아부은 그 회사로부터 합격 통보를 받고 싶었다. 그래서 그날 마지막 코스로 트레비 분수를 방문했다.
"어, 동전이 두 개 밖에 없네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뭔가에 홀린 듯 나머지 동전을 주겠다 말했다. 주머니를 뒤져 가장 무겁고 큰 2유로 동전을 건넸다. 그때는 금액이 클수록 무게가 무거울수록 소원이 더 잘 이루어질 것 만 같았다. 동전을 받아 든 그녀는 분수 가까이 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갔고, 난 가장 가까운 젤라떼리아에서 젤라토 두 개를 사들고 그녀를 기다렸다. 동전을 던지고 온 그녀는 그날 가장 환한 미소로 나에게 다가왔고, 젤라토를 먹으며 테르미니 역까지 걸어 숙소인 한민 민박으로 같이 돌아왔다.
다음 날,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갔고 나는 남은 여행을 마치고 2주 후에 파리로 돌아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페이스북 메신저로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
"나 그 회사에 합격했어! 한국 오면 연락해, 내가 밥 한 번 꼭 살게."
한국에 돌아가면 연락하겠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이듬해 2월 합정에서 만났고, 그날부터 연인이 됐다.
2012년, 교환학생으로 파리에 머무는 중간 2주간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다. 첫 목적지는 로마. 당시에는 한 푼이라도 아껴야 했기에 테르미니 역 근처에 있는 한인민박에 숙소를 잡았다. 며칠째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다 같이 아침 식사를 먹는 와중에 투숙객 한 분이 귀국행 비행기 편이 변경되어 프랑크푸르트까지 가는 기차 스케줄을 바꿔야 하는 상황이었다. 마침 과제를 제출하기 위해 노트북도 갖고 있었고, 오전에 특별한 일정이 없었던 터라 도와준다며 나섰다. 그 때나 지금이나 오지랖은 타고나는가 보다.
어쨌든 그녀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했다. 그녀는 고맙다며 일정 중에 시간이 되면 밥을 사주겠다고 했다. 가난한 학생이었던 터라 '밥을 사준다.'는 말에 덥석 "감사합니다." 하고 제안을 받았다. 평소 같으면 그냥 거기서 약속을 잡고 끝냈을 텐데, 그날은 조금 더 욕심을 냈다.
"괜찮으시면, 내일 하루 같이 여행 다닐래요? 제가 가려고 했던 곳이랑 가고 싶으셨던 곳을 섞어서 같이 다니면 좋을 거 같아요. 밥은 제가 꼭 가고 싶었던 곳이 있는데 거기서 사주시면 더 좋고요!"
그녀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은 없으니 내가 가고 싶었던 곳들을 같이 가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다음 날, 아침 식사 후에 같이 로마 여행을 떠났다. 모든 일정이 기억나진 않는다. 다만 일단 엄청 많이 걸어 다녔고, 힘든 일정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래도 1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나는 순간들이 있다.
우선 뿔이 달린 모세 조각상이 있는 성당에 갔다. 나보나 광장에 가서 분수를 꽤 오랫동안 봤던 것 같다. 가고 싶었던 레스토랑을 가기 위해 캄포 데 피오리로 갔고, 가이드 북에 따르면 '세계 최초로 까르보나라'를 만들었다는 'La Carbonara' 점심을 같이 먹었다. 이때만 해도 가이드북에 적힌 정보들을 철썩 같이 믿었던 터라, 같이 먹으면서 까르보나라는 원래 '석탄광부'들이 도시락으로 먹었던 음식이네 뭐네, 후춧가루를 석탄가루처럼 보이게 뿌린 거네 뭐네 하는 말을 마구 했던 것 같다. 거기에 덧붙여, "우리가 한국에서 먹는 까르보나라는 가짜예요. 이렇게 크림소스 없이 계란 노른자와 치즈로 버무리 듯이 만들어진 게 진짜 까르보나라죠. 우리가 한국에서 먹는 건 그냥 크림 파스타예요."라는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째튼 가이드북의 정보와 달리 그 식당에서 까르보나라가 처음 시작된 건 아니지만 그 자리에서 1912년부터 영업을 해온 유서 깊은 식당인 건 변함이 없다. 내 입맛엔 꽤 맞았던 것 같은데, 그녀는 같이 시킨 토마토 파스타를 더 좋아했던 것 같다.
그렇게 조금 늦은 점심을 먹은 후, 판테온을 같이 둘러봤다. 그날은 판테온 지붕이 왜 뚫려 있는지는 몰랐고, 그저 그 거대한 돔의 크기에 압도당한 채로 하염없이 천장을 바라보며 걸었다. 판테온을 둘러본 후 맞은편에 있는 Tazza D'oro에서 에스프레소를 두 잔이나 마셨다(가이드북에서 로마 3대 카페네 뭐네 해서 일부러 찾아갔었다.). 블렌드 한 잔,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한 잔. 그녀는 에스프레소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나를 신기한 듯 바라보기만 했다.
성당 몇 군데를 더 둘러본 후 판초 언덕에서 석양을 보기 전까지 스페인 광장 계단 꼭대기에서 시간을 때웠다.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것처럼 스페인 계단에서 젤라토를 먹고 싶었는데, 이젠 그러면 안 된다는 얘기를 주고받았다. 콘도티 거리를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Antico Caffe Greco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그녀도 거기서 에스프레소를 마셨다고 했다. 근데 또 마시고 싶진 않았다고 했다. 유럽 여행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만나봤을 팔찌 팔이꾼(?)이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허니문 왔어?"라는 질문에 그녀는 "아니, 내 남자 친구는 한국에 있어."라고 답했다. 그 한마디에 이탈리아 아저씨는 금세 물러 났다.
일몰시간이 다가와 판초 언덕에서 포폴로 광장을 바라보며 로마가 붉게 변하는 걸 같이 바라봤다, 해가 질 때까지.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우리의 마지막 여행지 트레비 분수로 향했다.
"트레비 분수에 동전 세 개를 던지면서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데요."
"정말요? 와, 그럼 나 소원 좀 빌고 와도 돼요?"
"네, 다녀오세요! 그래서 일부러 트레비 분수에 온 걸요."
"그랬구나. 그럼 잠깐만 기다려줘요. (주머니를 뒤지더니) 어, 동전이 두 개 밖에 없네요..."
이번 여행 목적 중 하나는, 10년 전에 함께 갔던 곳들은 한 번 씩 더 가보는 거였다. 그 사람에 대한 미련이나 그리움 때문은 아니었다. 좋아하는 영화를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래서 여행 일정 중간중간 그녀와 함께 갔던 곳들을 추가했다. 그때 다녀온 성당들은 기억이 나질 않아 과감히 제외했다. 성당들을 제외하고 나니 대부분 관광지라 어차피 한 번은 지나갈 곳들이라 별도의 준비는 필요하지 않았다.
여행 첫날 제일 먼저 간 곳은 스페인 광장이었다. 스페인 계단 끝까지 올라 콘도티 거리를 바라봤다. 이번엔 나에게 팔찌를 팔기 위해 접근하는 사람이 없었다. 해 질 녘, 천천히 판초 언덕으로 이동했다. 다시 그 자리를 찾아가 포폴로 광장을 바라보며 해가 지는 걸 바라봤다. 판초 언덕은 여전히 저녁 노을을 보러온 사람들로 붐볐다. 그 인파에 파묻힌채 해가 질 때 까지 가만히 포폴로 광장을 내려다 봤다. 그 날 그랬던 것처럼.
둘째 날은 판테온과 Tazza D'oro를 갔다. 겨울과 달리 관광객이 많은 여름철이다 보니 판테온에 들어가진 못했다. Tazza D'oro도 문 닫기 직전에 겨우 방문해서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에스프레소만 한 잔 빠르게 먹었다. 마감 시간이 다 돼서 갔더니 직원들이 싫은 티를 팍팍 내서 급하게 마시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에스프레소는 빠르게 먹는게 제맛이지 라며 그냥 후다닥 나왔지만, 뭔가 쫓겨나는 느낌이 들어 아쉬웠다.
마지막 날엔 La Carbonara와 나보나 광장, 그리고 트레비 분수를 방문했다. 이번 로마 여행에서는 피자만 먹어야지 생각했었지만, La Carbonara는 예외였는데... 영업시간을 잘못 알고 갔던 터라 결국 사진만 찍고 돌아와야 했다. 그 대신 캄포 데 피오리에서 꽃구경도 하고, 나보나 광장에서 분수를 따라 몇 번을 돌고 돌았다. 까르보나라는 못 먹었지만, 그 시간만큼 이곳에서 머물고 싶어서.
그리고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밤, 일부러 다시 한 번 트레비 분수를 찾았다. 10년 전에 그랬던 것 처럼.
트레비 분수는 여전히 밤에 더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이번엔 내가 동전 세 개를 분수에 던졌다. 그녀의 소원이 이루어졌던 것처럼 내 소원도 이루어지길 진심으로 바라면서. 젤라토는 먹지 않았다. 트레미니 역까지 걷지도 않았다. 대신 트레비 분수 가까이 내려가 한참을 그 공간에 머물며 생각에 잠긴 채 그 순간을 즐겼다.
한참을 멍하니 서있다 이번에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면, 다음에 또 로마에 오면 다시 한 번 마지막 날 밤에 트레비 분수를 찾아야겠다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소원을 빌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 최근 몇 년 간 잊고 있던 질문이 하나 떠올랐다.
그날, 그녀에겐 진짜 동전이 두 개 밖에 없었을까? 그건 아직도 미스터리다. 기왕이면 동전이 두 개뿐이라는 건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조금은 특별한 추억을 만들기 위한 그런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소원을 빈 후, 테르미니 역까지 걸어서 한인민박으로 돌아오는 길. 젤라토를 다 먹고 나서 언제부턴가 손을 잡고 걸었다. 아니, 그랬던 것 같다. 아마도 시간이라는 판타지인 것 같긴 하지만, 기왕이면 손을 잡고 걸었던 기억이 진실이면 좋겠다. 우연히 두 개뿐이었던 동전과 함께 꿈같은 하루를 완성하기에 그보다 더 훌륭한 엔딩은 없을 테니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