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날, 어제와 달리 날이 참 맑다. 하늘만 봐도 행복해지는 날씨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은 아직 차갑다. 바람이 조금 잦아들면 폴딩도어를 열고 바람을 차분히 만끽하면 좋을 것 같다.
필라테스 등록 상담이 오전 10시에 잡혀 있어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섰다. 시내로 나가는 291번(혹은 292번) 버스의 시간을 맞춰 나간다고 하더라도 환승하는 버스의 시간까지는 맞추기 힘든 탓에 예상한 것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초행이라 2시간을 잡고 나오길 잘했다.
이번 한 달 살기에서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건강해지는 거다. 작년 종합검진 때, 대략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4년 만에 처음으로 '재검' 요청이 있었다. 스트레스 탓인지 간 수치도 무척이나 높았고, 혈압이랑 당 수치까지 높아 정밀 검진이 필요했다. 병원 다니면서 연차를 몇 개나 날려 먹었던지... 그나마 건강 검진 이후 불필요한 스트레스나 걱정은 조금 내려놓고, 먹는 것도 조심하다 보니 혈압이랑 당 수치는 정상 수준으로 돌아왔는데 간 수치만큼은 여전히 정상치를 상회했다. 수치로 보이는 것 외에도 몸에서 느껴지는 컨디션도 최악이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필라테스를 통해 코어 근육 단련을 시작하고 인천으로 돌아간 후에도 지속적으로 관리를 해나갈 생각이다. 이를 위한 첫걸음마를 떼러 1시간 반이 넘는 시간을 달려 센터에 도착했다. 상담은 생각보다 금방 끝났다. 강사님이랑 시간 맞춰 보고 연락 주신다고 하시길래 알겠다고 하고 센터를 나섰다. 3일에 한 번 꼴로 나와야 하는지라 일정 잡는 것도 쉽지 않을 듯하다. 매번 왕복 3시간이나 이동해야 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 시간에 책을 읽거나 동영상 콘텐츠를 보면 되고 시내에 나온 김에 식빵이나 반찬거리 등을 사들고 갈 생각이니 괜찮다. 무엇보다 건강해진다면 하루에 네다섯 시간쯤이야.
의도했던 건 아닌데, 식빵 공급처(?) 후보지 중 하나인 '메종 드 쁘띠푸르'가 필라테스 센터와 꽤 가까운 거리어 있다. 차 타고 가기엔 애매하고 걸어가기엔 조금 먼 정도의 거리. 버스 배차 간격이 워낙 길기 때문에 운동 삼아 걸어갔다. 날이 좋아 걷기 좋았다. 여행을 왔으면 지나지 않았을 동네를 지날 수 있는 것도 좋았다. 그렇게 여기저기 구경하다 도착한 빵집에서 식빵을 사고 근처에 있는 올리브영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좀 샀다. 일단 백팩에 욱여넣고 이마트로 가는 길을 찾아봤는데 생각보다 꽤 멀다. 한 번에 가는 버스도 없다. 마침 점심시간도 다가오겠다, 제주도에 오면 한 번쯤은 들르게 되는 칠성로 스타벅스에서 잠깐 숨을 고르고 이마트로 향했다.
어제 적어둔 물품들 중에서 인터넷으로 주문한 애들을 빼고, 오늘 당장 필요한 것들, 앞으로 필요한 것들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발뮤다 토스터로 토스트를 해 먹을 때 필요한 버터, 아침 식사용 시리얼, 방울토마토, 바나나, 파스타면, 파스타 소스, 올리브 오일, 바질, 스팸, 라임 등등 하나로마트에서는 안 팔 것 같은 식재료와 스크램블 에그 할 때 필요한 스패츌러 테이블 매트, 밑반찬 담을 글라스락, 물티슈 같은 생필품(집에 있는 소품 몇 개가 JAJU꺼길래 일부러 JAJU로 다 맞춰 버림)들을 조금씩 담다 보니 어느새 카트 한 가득 쌓여있다. 결제 금액은... 음... 나 이번 달에 돈 좀 아낄 생각이었는데, 오늘 하루 만에 전체 예산의 20%가 사라져 버렸다. 아무래도 예산을 잘못 짠 거 같다. 흠...
아무튼 이마트 코끼리 장바구니를 가득 채운 후 들어 보니 들고 걸어 다닐 무게가 아니었다. (도대체 뭘 산 거지... 딱히 산 게 없는데) 그래도 이런 와중에 택시 타고 바로 집으로 간 게 아니라 터미널에서 다시 버스 타고 간 건 칭찬(?)할만한 일이다 싶다.
가장 빨리 도착하는 버스를 타고 봉성리로 향했는데 하필이면 봉성리주민센터에서 다른 마을을 경유해서 봉성리 하나로마트로 가는 버스였다. 빙글 돌면 버스 타고 10~20분, 걸어가도 10~20분이라 걸어갈 생각으로 한 정거장 일찍 내렸다. 그리고 정확히 30초 후에 바로 후회했다. 아까 장바구니 무겁다고 터미널까지 버스 안 타고 택시 탔던 사람이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래도 집에 가는 길에 분리수거하는 클린? 그린하우스도 보고, 동네 강아지 두 마리랑 인사를 나누고, 데드 리프트 몇 번 반복하고 나니 집 앞 골목에 도착했다. 버스보다 먼저 도착하긴 했는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었나 싶다. 다음부턴 그냥 원래 내려야 하는 정거장에서 내려야겠다.
일단 식재료들을 냉장고에 우겨 놓고 곧장 오름으로 향했다. 어도오름(표고 : 143.2m, 비고 : 73m, 둘레 : 2,329m, 면적 : 376,225 제곱미터, 말굽형), 앞으로 매일 하루에 한 번 산책을 다녀올 오름의 이름이다. 과거에는 도노미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숙소가 있는 마을 어디서 봐도 잘 보이는 오름이다. 조선시대에는 봉수대도 있었다고 한다. 어째튼 집을 나서 마을 골목길을 따라 큰길(이래 봤자 왕복 2차선..) 하나를 건너면 바로 산책로 입구다. 경사도 완만하고 숲도 적당히 잘 우거져 있어 산책하기 참 좋은 오름이었다. 게다가 하늘까지 맑으니 오름을 도는 내내 기분이 더 좋았던 것 같다. 집에서 산책로 입구까지 10여분, 산책로를 따라 분화구까지 10분 이내, 분화구 둘레를 따라 구성된 산책로를 한 바퀴 도는데도 넉넉 잡아 10분이면 충분했다. 이래저래 집에서 출발해서 왕복으로 대략 40여분 이면 충분히 여유로운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오름이다. 그날그날 컨디션이나 상황에 맞춰 둘레길을 도는 횟수를 늘려가면 좋을 것 같다. 오름을 한 바퀴 돌고 내려오는 길, 앞으로 매일 인증샷을 찍을 만한 포토스팟도 하나 찾았다. 감귤창고와 푸르른 보리밭, 저 멀리 보이는 한라산 능선까지 완벽한 포토스팟, 아니 모든 게 완벽한 오름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하나로 마트에 잠깐 들렀다. 다행히도 열려 있었다. 아까 이마트에서 무거워서 못 산 쌀을 사들고 영업시간을 여쭈어봤는데 주말에는 3시면 닫는다고 하신다. 앞으로는 실수하지 말아야지.
집에 도착하니 슬슬 허기가 진다. 하루 종일 먹은 거라곤 이마트 가기 전에 잠깐 들른 스타벅스에서 먹은 녹차 베이글 샌드위치 하나뿐이었다. 하나로마트에서 산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밑반찬을 만들었다.
첫 번째 반찬은, 내 필살기, 푸칠리 토마토 냉파스타다. 아주 오래전, 10년도 더 전에, 운 좋게 학교에서 진행하는 해외 프로젝트에 선발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거주했던 때 처음 만들었던 메뉴다. 그때 친구 세 명과 함께 집을 빌려서 같이 지내고 있었는데, 그때 만들었던 밑반찬이 푸칠리와 비엔나 소시지, 감자, 양파, 당근 등을 볶아 넣은 냉파스타였다. 이게 은근 조리도 쉽고 데워 먹거나 차갑게 먹어도 좋은 반찬이라 그 이후로 종종 써먹는 레시피 중 하나다. 이번에는 감자볶음을 따로 할 생각이라 푸칠리와 양파, 비엔나 소시지, 당근을 토마토 소스에 볶았는데, 역시나 성공적이다.
두 번째 반찬은 감자볶음. 감자와 당근을 채 썬 후에 볶아내는 요리다. 채 써는 거 한 세월 걸렸는데... 볶는 건 진짜 금방이다. 제주도 답게 당근이 진짜 맛있어서 감자만 골라먹었던 평소와 달리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두 가지 밑반찬을 끝내고, 제주에 와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상을 차렸다. 직접 지은 밥, 직접 만든 밑반찬, 이마트에서 공수한(?) 저염 명란젓, 어제 저녁 식사를 구해준 김까지 차려놓으니 꽤 그럴듯한 밥상이다. 배가 고파서 맛있는 건지 진짜 맛있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맛있게 먹었으니 됐다.
해가 진 후의 마당도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하늘이 코발트 블루 빛으로 뒤덮이는 순간이 있는데, 그 순간 마당의 조명들이 켜지면서 무척이나 운치 있는 분위기가 완성된다. 저절로 차분한 음악이 듣고 싶어 지는 저녁이다.
제주도에서 온전히 하루를 보낸 첫날, 뭔가 바지런히 지났다. 이렇게 매일 가득 찬 일상이 반복되는 것도 좋지만, 기왕이면 조금은 느슨한, 조금 다른 템포의 일상도 즐길 수 있을 만큼 이곳에 적응하고 정이 들었으면 좋겠다. 조만간 그런 날이 오겠지. 보통 여행을 떠난 후 이틀을 꽉 채우고 나면 마치 원래 살던 곳처럼 편안해지고 익숙해지는 그런 순간이 있는데, 여기서도 그런 날이 올 거라 믿는다. 아마도 조만간.
p.s. 어제부터 느낀 거지만, 제주도 시골 마을의 밤은 어둡고, 바람이 매우 거세다. 새벽에 일어나 물을 마시러 주방에 잠시 나왔을 때, 문득 영화 <어스>와 <퍼지> 같은 일이 벌어지면 난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했는데, 오늘도 바람이 장난 아니다. 어두워지면 커튼을 치긴 해야겠다. 이래저래 꼭 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