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이틀간의 기록, 그 첫 번째는 버킷리스트 실행하러 가기.
[명사] <종교> 순례자가 종교적 의무를 지키거나 신의 가호와 은총을 구하기 위하여, 성지 또는 본산 소재지를 차례로 찾아가 참배하는 일.
Ace Hotel에 체크인을 마치자 마자 캐리어를 방 안으로 밀어 넣고 곧장 호텔을 나왔다. 이미 수 십 번도 넘게 확인했지만 다시 한 번 구글 맵을 켜고 '1912, Pike place'를 목적지에 입력했다. 도보 10분.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하지만 그 누구보다 경쾌한 발걸음을 뗀다. 마치 연인과 첫 데이트를 앞둔 사람처럼.
시애틀에는 우리 나라 만큼이나 카페와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우중충한 날씨가 아닐까 싶다. 시애틀 사람들은 시애틀이 맑은 날보다 우중충하거나 비 오는 날이 더 많다고 얘기하곤 했다. 우리가 시애틀을 생각하면 떠올리는 이미지 속의 날씨도 대부분 그런 날씨다. 그리고 그런 날씨 일수록 커피가 더 맛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텐데, 비 오는 날엔 이상하게 커피가 더 맛있다. 우중충한 날씨가 만들어 내는 분위기 탓도 있지만, 커피 향이 더 오래 머물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거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감히 단언컨데, 스타벅스의 힘이다. 스타벅스가 시애틀의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에서 원두 로스팅을 넘어 라떼를 팔기 시작하며 미국 스타일의 카페문화(커피 전문점 문화)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문화를 처음 접한 게 바로 시애틀 사람들이었으니 그들의 커피 사랑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난 시애틀에 도착하자 마자 그 역사가 시작된 그 곳으로 향했다.
난 자타가 공인하는 스타벅스 마니아다. 틈만 나면 스타벅스에 앉아서 시간을 죽이곤 한다. 여행을 다니며 모은 스타벅스 텀블러가 140여개나 되고, 지난 해에는 스타벅스 스탬프를 받기 위해, 운전만 12시간을 넘게 해서, 일산에서 거제와 진해를 하루 만에 다녀온 적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미국 여행의 첫 여행지가 시애틀이 된 것도, 스타벅스 1호점이 시애틀에 있기 때문이었다.
시애틀에서 사람이 제일 많이 몰리는 곳 중 하나인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지역 내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이 몰려 있는 곳, 그 곳이 나의 목적지다. 가슴 가득 부푼 설렘을 안고, 9월 치고는 뜨거운 햇살을 가로질러 거침 없이 나아갔다. 그리고 드디어 내 시야에 조금은 어색한, 갈색의 사이렌이 그려진 스타벅스 브랜드 로고 세 개가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꿈 속에서 수 백 번 도 더 왔다 갔던, 나의 성지의 바로 앞까지 왔다.
발걸음이 점점 더 빨라 진다. 빨라진 발걸음 만큼 심장 박동도 빨라 진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매우 열정적으로 퍼포먼스를 펼치는 버스킹 아티스트.
1호점에서만 판매하는 굿즈를 사기 위해, 커피를 마시기 위해 줄을 서있는 사람들.
여행을 기념할 사진을 남기기 위해 열심히 포즈를 취하고, 셔터를 누르는 사람들.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에 있는 원두 가게에서 시애틀 최대 관광 명소가 되어버린 스타벅스 1호점 답게,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곳에서의 시간과 추억을 기념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수 는 없는 법. 대기줄을 거슬러 올라가 꼬리에 섰다. 10년을 기다려 왔기에 몇 십 분의 기다림은 아무것도 아닐 줄 알았건만, 매장 입구가 가까워 지면 가까워 질 수록 그 짧은 시간이 10년보다 더 길게 느껴졌고 조급함은 더해졌다. 만약 바리스타 Christie와의 즐거운 대화가 없었다면 아마 열 손가락의 손톱이 모두 없어졌을 지도 모른다.
한 두 사람만 더 계산이 끝나면 내가 들어갈 차례가 올 것 같았다. 그 순간 Christie가 다가와 매장 내에서 판매 중인 굿즈들에 대해 설명을 해줬다. 스타벅스 1호점에서는 총 16개의 굿즈를 판매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 모든 걸 카운터에서 주문할 수 있으니 매장을 돌아다니며 집어 올 필요가 없다고 안내해 줬다. 그리고 자연스레 대화가 시작됐다.
한국에서 왔다, 한국 사람들 참 많이 온다, 미국은 무슨 일로 왔냐 등등 여행을 떠나 사람들을 만나면 자연스레 주고받는 대화들이었다. 그리고는 예견된 수순처럼 스타벅스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 갔다. 이때부터는 대화라기 보단 나의 스타벅스에 대한 애정을 일방적으로 전하는 시간이 되어버렸다. 여행을 다니며 수집한 텀블러가 100개가 넘는다 (100? Awesome!), 하워드 슐츠의 사인을 받으며 언젠가 스타벅스의 파트너로 일하고 싶다는 말을 했었다 (Good luck!) , 시애틀에 여행을 온 이유는 (과장 조금 보태서) 오롯이 스타벅스다 등등. Christie는, 친절하게도, 혼자 신나서 떠드는 와중에 정신 없이 떠드는 와중에 드디어 한 무리가 문을 통해 빠져 나왔고, Christie의 리저브 로스터리 플래그십을 반드시 가보라는 추천과 스타벅스를 좋아해줘서 고맙다는 인사, 여행을 즐겁게 잘 마치길 바란다는 따듯한 인사말과 함께 매장 안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스타벅스 1호점에 대한 첫 인상은, 훨씬 더 어마무시하고 감동적인 반응일거라 생각했건만, '생각보다 크네'였다. 내 상상속의 모습은 10평이 채 안되는 조그마한 동네 카페였다. 미리 이 곳을 다녀온 사람들이 '생각보단 작았어.', '사람이 많아서 움직이기 힘들더라.'라는 말을 많이 해주었던 탓에 난 정말 열 댓 명 들어가면 꽉 차는 그런 곳인 줄 알았다. 그런 모습이 더 로맨틱할 것 같기도 하고.
"생각보다 크구나" 하고 멍 때리고 있는 사이 금새 내 차례가 왔다. 아까 Christie와 대화를 하면서 사기로 결심한 굿즈 6개를 빠르게 골랐다. 주문이 들어가자 다른 바리스타가 분주하게 굿즈를 가지고 와 내 앞에 가져다 놓는다. 내가 선택한 굿즈가 맞는지 확인하고 아이스 라떼를 한 잔 주문했다. 한국에서는 토피넛 라떼 외에는라떼를 마시지 않지만 이 곳에서는 반드시, 지금의 스타벅스를 있게 한, 라떼를 마셔야만 했다. 스타벅스의 라떼는 맥도날드의 빅맥, 버거킹의 와퍼처럼 스타벅스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메뉴니까. 그리고 내 버킷리스트에 "스타벅스 1호점에서 라뗴 마시기."가 있으니까.
Okay, iced tall latte. Anything else? / Nope, latte and goods. That's all. / Awesome, what your name? / MOJO, M, O, J, O.
투명한 아이스 컵에 소문자로 mojo라고 적혀 음료를 만드는 바리스타에게로 전달됐다.
굿즈와 음료 값을 계산하고 나서 음료를 기다리는 중에 매장을 빙글 둘러 목재로 된 바가 눈에 띄었다. 음료를 기다리며 바에 기대어 매장을 찬찬히 둘러본다. 그리고 기념품을 사러 몰려든 관광객들과 기계처럼 주문을 처리하는 바리스타들이 보였다. 내가 기대했던 것 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아쉬움을 지우기 위해 눈을 감고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매장에 들어온 손님이 바리스타와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주고 받는다. 그가 커피를 주문하는 동안 다른 손님들이 매장에 들어온다. 손님들끼리 인사를 주고 받는 동안, 에스프레소 머신 근처에서 원두를 글라인딩 하는 소리, 템핑을 위해 두드리는 소리, 머신이 에스프레소를 뽑는 소리가 들린다. 금새 기분 좋은 커피 향이 주변을 감싼다. 이어서 우유를 뎁히는 스팀기의 소리가 매장에 울려 퍼진다. 그새 사람이 더 늘었다. 나무 바 근처에 저마다 한 손에 커피를 든 채 모여 들어 이야기 꽃을 피운다. 어떤 사람은 신문을 읽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다. 그 때 또 다른 손님이 들어와 음료를 주문한다. 캐시어 앞에 있는 바리스타가 아이스 톨 라떼를 콜링한다, 머신 앞에 있던 바리스타가 컵을 건내 받으며 주문을 확인하기 위해 아이스 톨 라떼를 콜링하며 컵에 얼음을 담는다. 방금 들어온 남자가 음료를 만드는 바리스타에게 인사를 건낸다, 자주 들르는 사람인가 보다. 글라인딩, 템핑, 추출이 이어지고 얼음 위에 신선한 우유가 준비 된다. 추출이 막 끝난 에스프레소 샷 두 개가 우유 위에 뿌려지자 커피가 그라데이션처럼 퍼져 나간다.
"Iced latte for MOJO!"
정말 완벽한 타이밍에 바리스타의 목소리가 스타벅스 1호점에 울려 퍼졌다. 기분 좋은 상상에서 깨어나 음료를 받으러 갔다. Chris는 가볍게 컵을 한 두 번 돌린 후 나에게 라떼를 건냈다. 라떼를 받아든 그 순간 시애틀에 온 이유,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드디어 이루어 졌다.
매장을 벗어나 버킷리스트 실행 인증샷을 하나 남기고 나서 라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정말 맛있었다. 9월 치고는 뜨거운 햇살과 청명한 가을 하늘고도 너무나 잘 어울렸다. 라떼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행복했다. 성지에서 인생 라떼를 만났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라떼를 바닥에 두고 참배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단언컨데, 그 순간만큼은 이 세상 누구보다 행복했을 거다. 지금 이 순간에는 이걸로 충분했다.
그렇게 나의 성지 순례는 6개의 굿즈와 잊지 못할 추억, 잊지 못할 라떼를 남기며 막을 내렸다.
본 게시글은 독립 출판물로 제작하기 위해 작업 중인 지극히 개인적인 여행기의 초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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