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7일 토요일

by 모조

일곱 번째 날, 제주에서 보낸 첫 일주일. 아무것도 안 하고 먹고사는 것만 고민하다 보니 매일 비슷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일상들도 채워지는 게 좋다, 신기하게도.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고요한 집에 울려 퍼지는 빗소리에 일찍 잠에서 깼다. 지금 머무는 집을 선택하면서 꼭 하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비 오는 날 폴딩도어를 활짝 열고 빗소리를 듣는 거였다. 스피커를 산 후에는 빗소리에 어울리는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한 잔 마시는 거였다. 그리고 지금은 비가 내리는 걸 가만히 앉아 바라보는 거다. 나무데크에 물방울이 부딪히는 소리, 지붕에 물방울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시간을 보낸다. 상상했던 것만큼 완벽하진 않지만, 그토록 바라던 순간에 머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좋다.



시폰 케이크처럼 폭신하고 부드러운 프렌치토스트를 먹었다. 프렌치토스트를 해주시기 위해 전날 밤부터 식빵을 잘라내고, 계란옷을 흠뻑 입힌 채로 오랜 시간 숙성시켜서 만들어진 프렌치토스트는 상상 이상으로 부드러웠다. 지금까지 집에서 먹는 프렌치토스트는 그냥 식빵을 삼각형으로 잘라서 하나하나 계란옷 입혀 구워 먹는 게 전부였다. 이렇게 브런치 카페에서나 먹을 법한 프렌치토스트도 집에서 가능하다니.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 같다. 파우더도 사고, 블루베리 잼도 좀 사고, 바나나도 좀 사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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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내내 비가 내렸다. 비가 와서 그런지 뭔가 새로운 걸 하고 싶진 않다. 그냥 익숙한 것들은 평소보다 더 차분하고 느린 템포로 천천히 즐겼다.


비가 잦아든 틈을 타 오름에 다녀왔다. 비 오는 날의 오름은 비를 머금은 흙과 나무에서 나는 내음부터 분위기까지 맑은 날과는 매우 달랐다. 산책로를 두 바퀴 돌 동안 감사히도 비는 내리지 않았고, 덕분에 분위기를 만끽하고 돌아왔다. 물론 내려오는 길에 무섭게 따라오는 비구름에 겁먹고 발걸음이 빨라지긴 했지만 기우였다. 무사히 오름 산책 끝. 미션은 계속 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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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는 날은, 흐린 날과 또 다르다. 비오는 날만의 매력이 있다.


어제 반찬통 두 개가 비었다. 미리 준비해둔 어묵으로 어묵 볶음을 해서 다시 반찬통 두 개를 채웠다. 사각 어묵 10장을 가늘게 썰고, 간장 세 스푼, 물 한 스푼, 설탕을 넣고 살짝 졸인 후에 어묵 넣고, 청양고추 넣고, 꿀이나 올리고당 조금 뿌려주고, 마지막에 참기름 살짝 두른 후에 통깨 뿌리면 끝. 진짜 금방 끝난다. 맛도 있다. 진짜 효율성 끝판왕 밑반찬이다.


저녁으로 사케동을 해 먹었다. 혼자 있었으면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메뉴들이 매일 식탁에 오르고 있다. 혼자 먹는 식사와 함께 먹는 식사는 단순히 분위기나 식사하는데 걸리는 시간뿐 아니라 메뉴에서도 차이가 있다는 걸 새삼스레 깨닫는다. 그리고 보통 함께 먹는 식사일수록 메뉴도 시간도 더 값어치 있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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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민스님이 말씀하셨다. 6일째 습관을 만들어 오고 있는 건 잘하고 있는 거라고. 스스로 어깨를 토닥여주며 칭찬할 일이라고. 별거 아니지만, 과하거나 부족하지 않게 세 끼를 챙겨 먹고 있고, 오름도 매일 가고 있고, 한라산을 올라가기 위한 하체 운동도 매일 하고 있다. 거기에 코끼리 앱 덕분에 명상도 매일 하고 있다. 아직 일어나서 하는 것, 자기 전에 하는 것이 확실히 루틴화 되어 잡혀 있진 않지만, 점차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생각으로는 아침에 일어나서 가볍게 스트레칭하고, 물 한 잔 마시고, 커피를 내리는 정도가 제주의 한 달 살기를 마친 후에도 꾸준히 할 수 있는 루틴이 아닐까 싶다. 잠들기 전에는 물 한 모금 마시고, 한 가수의 노래를 듣고, 일기를 쓰고, 침대로 향하는 루틴을 지켜가면 좋을 것 같다. 솔직히 일주일 정도면 루틴이 벌써 잡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직 먼 이야기 같다. 그래도 습관은 들이고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칭찬할 일이라고 합니다. 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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