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8일 일요일

by 모조

여덟 번째 날, 비 내리던 어제와는 너무나도 다르게 날이 쨍쨍하게 맑았던 하루.


요즘 매번 오전에 일정이 있으면 늦잠을 자는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일정이 없을 때 일어나서 할 일이 더 많다. 오전 일정까지 아직 여유시간이 있다 보니 계속 시계를 확인하고는 다시 눈을 감는다. 두세 번 잠이 들었다 깼다. 세 번 다 꿈을 꾸긴 했는데 기억이 나진 않는다.


늦게 일어나도 아침은 잘 차려먹었다. 커피 내리고, 햄치즈 토스트 하고, 스크램블드 에그 예쁘게 해서 든든하게 챙겨 먹었다. 배 타려면 든든하게 먹어야 한다.

20200308_074659.jpg
20200308_074705.jpg


차귀도로 생에 첫 바다낚시를 다녀왔다. 미끼를 끼우는 것부터가 참 고욕이었다. 같이 배에 오른 세 팀 중에 한 팀이 너무나도 프로패셔널(?)하신 탓에 선장님이 별다른 교육 없이 곧장 자리 잡고 후다닥 낚시를 시작했다. 한두 번 하다 보니 미끼를 끼우는 건 조금 익숙해지는 것 같았는데, 그냥 매번 다 새롭다.

그래도 미끼를 낚싯바늘에 끼워서 넣는 건 금방 익숙해졌다. 찌를 마구 내려놓고 기다리는데 도무지 입질이 오는지 어떤지 알 수가 없다. 입질이라는 게 어떤 느낌인지 파악하는 데 전체 낚시 시간에 절반을 보낸 것 같다. 그나마 마지막에 고등어들 덕분에 손맛 좀 봤다. 고등어가 모여있는 스팟에서는 진짜 미끼만 달아서 넣으면 곧장 입질이 왔다. 그렇게 "아, 이게 입질이구나."를 깨닫고 나니 귀항할 시간이었다.

20200308_094921.jpg
20200308_100501.jpg
생애 첫 배낚시를 함께 한 배와 차귀도.


운 좋게(물고기 입장에서는 운 나쁘게) 건져 올린 물고기로부터 낚시 바늘을 빼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어떤 분들은 그냥 쏙 빼내던데, 난 왜 이리 오래 걸리는 건지. 심지어 한 번은 바늘이 아가미 안 쪽에 너무 깊이 박힌 바람에 빼는 사람도, 잡혀있는 물고기도 한참을 고생했다. 얼마나 미안하던지, 친구 말을 빌리면 고등어가 비명을 지르는 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 그리고 고등어 너무 미끄러워... 기름 왜 이리 많아. 아우...



이렇게 처음 해보는 낚시에 한참을 어리바리 떨며 헤매는 와중에 같이 간 친구는 쥐치를 잡았다. 세상에 쥐치라니! 쥐포 만드는 그 쥐치. 같은 배에 타고 있던 모두가 쥐치를 보러 구경을 왔고, 선장님은, 낚싯배가 뜬 이후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뜰채를 갖고 와서(잡힌 어종 중에는 제일 귀하신 몸인) 쥐치를 건져 올리셨다. 함께 낚시를 했던 어떤 아저씨의 말처럼 쥐치 한 마리를 건졌으니 뱃삯은 번거나 다름없었다.

낚시로 건져 올린 물고기들이 활어회로, 튀김으로, 매운탕으로 한 상 차려졌다. 쥐치는 쥐포를 먹는 마냥 고소하고 달콤했고, 고등어는 갓 잡은 덕에 비린내가 적었다. 그래도 우리는 셋이 그럭저럭 잡은 덕에 충분히 챙겨 먹을 수 있었다. 이래저래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다음부터는 그냥 어부님들이 잡으신 물고기를 사 먹는 게 좋겠다.


20200308_120903.jpg 직접 잡은 쥐치(앞 쪽)와 고등어로 차려진 활어회. 그래도 주워 먹을 만큼은 잡아서 다행이다.


집에 오는 길에 들른 명월국민학교는 폐교를 개조하여 카페 겸 아이들 놀이터(?)로 활용하고 있는 곳이다. 너른 운동장에 여러 아이들이 공놀이, 비눗방울 놀이, 연날리기를 하는 걸 보고 있지나 괜히 미소가 지어진다. 운동장 뒤편으로 가면 비양도가 보이는 경치 좋은 뒷마당이 있다. 학생 때 학교 건물 뒤에는 그냥 분리수거함이랑 창고 같은 거나 있었던 것 같은데, 여기서 학교 다녔던 친구들은 매일 이런 풍경을 보며 자랐을 거라 생각하니 부럽기도 하다. 사실 뭐 초등학교 나이 땐 그런 풍경이 눈에 안 들어오겠지만. (여기서 근무하셨던 선생님들이 부러워진다.) 학교 공간도 잘 꾸며뒀지만 제일 좋았던 건 여기저기 아이들이 신나게 놀고 있다는 거다. 모든 공간이 이럴 필욘 없지만, 이런 공간이 꼭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중에 조카님이 제주에 오시면 꼭 모시고 가봐야겠다. 운동장에서 마음껏 뛰어놀게. 못 사줬던 바람개비도 사주고.


20200308_130408.jpg
20200308_131443.jpg
20200308_133412.jpg
20200308_131526.jpg
20200308_133727.jpg
삐그덕 거리는 나무 바닥도 좋고, 칠판도 좋고, 옛날 의자도 좋고, 운동장에서 뛰어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좋고, 바다가 보이는 풍경도 다 좋았다.


Home, sweet home. 외출했다 돌아오면 저절로 '와, 집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마음도 좀 편해지고, 자세도 조금 더 흐트러지고, 짐도 그냥 내 멋대로 내려놓을 수 있다. 이렇게 긴장이 풀리고 편안해진다. 마침 따듯한 햇살이 집을 가득 채우고 있다. 폴딩도어를 열고 새소리를 들으며 잠시 쉬어 간다. 내가 제주에 와서 하고 싶었던 게 이런 거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온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순간, 그게 지금이다.


Jeremi에서 사 온 예가체프 원두로 커피를 내려봤다. 분쇄 크기를 조금 더 작게 해야 할 것 같다. 향은 참 훌륭한데 너무 묽다. 조금 더 진하게 내리면 아이스로 먹어도 훌륭한 커피가 될 것 같다.


해가 지기 전에 오름에 다녀오기 위해 움직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흐린 날과 맑은 날은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다. 쨍하게 내려쬐다 나뭇가지 사이로 퍼지는 햇빛을 바라보면 금세 힘이 솓는다.

20200308_161716.jpg
20200308_163026.jpg
20200308_163720.jpg
매일 오름 오르기, 매우 성공적으로 진행 중!

계란장은 다 좋은데, 오래 보관할 수 없는 게 단점이다. 남아 있는 계란장을 다 꺼내고, 새로 만든 어묵볶음과 냉파스타와 함께 가볍게 저녁을 먹었다.

20200308_192352.jpg
20200308_192358.jpg
계란장 덮밥, 훌륭합니다. 밥이 따듯할 때 버터 살짝 녹여 먹으면 더 좋습니다.


하루 종일 날이 맑더니 밤에도 하늘이 맑다. 별이 보이지 않을 만큼 달이 밝게 떠있던 날. 조명이 예쁘게 켜진 마당에 머물며 한 참을 바라봤다. 이내 카메라를 챙겨 나와 이 분위기를 담아보려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카메라는 지금 느껴지는 모든 걸 다 담기엔 부족했다. 다음에 이런 날이 오면, 친구들과 같이 일부러 마당에 머물며 지금 느껴지는 이 모든 걸 함께 나눠야겠다. 언제든, 그때 그 휘영청 밝은 달이 있던 제주의 밤이 아름답지 않았냐며 함께 추억할 수 있게.



매거진의 이전글질문 일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