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12일 목요일

by 모조

열두 번째 날, 여러 말 필요 없다, 한라산을 무사히 잘 등반한 날이다.


아침 일찍 일어났다. 기분 좋은 긴장감에 개운하게 일어났다. 양쪽 무릎에 파스를 붙이고, 발목 보호대를 차고, 이래저래 만약을 대비한 준비를 마치고 한라산으로 향했다. 어제만큼 날이 맑아 백록담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생에 처음 등산화를 신고, 등산스틱까지 완벽하게 갖춘 후 산행을 시작했다.


솔직히 민폐를 끼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많았는데, 오죽하면 전날 밤에 달님 별님에게 무사귀환을 바랐을까, 매일 오름을 오른 덕분(?)인지 초반 페이스가 꽤 괜찮았다. 가방도 메들고, 즐겁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으며 올랐다. 해발 100m 단위로 이정표(?) 인증샷도 남기면서. 하지만 고수님들 눈에는 오버페이스라는 게 눈에 보였는지, 일부러 가방도 대신 메주시고, 중간에 세워주면서 페이스 조절도 적절히 해줬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덕분에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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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페이스 좋을 때 신나서 찍었던 사진들.


속밭 대피소까지는 완만한 길이 계속된 것 같다. 이다음 진달래 대피소까지 가는 동안 푸르른 나무나 하늘보다는 산길을 더 많이 본 기억이 나는 걸 보면 그렇다. 그 덕에 중간에 보라색 돌이나 식생이 변화하는 것도 잘 보고, 100m 구분석들도 잘 볼 수 있었지만 중간에 멈춰 서거나 물을 마시는 횟수가 늘었던 것 같다. 그래도 듣던 대로 진달래보호소까지는 어렵지 않았다. 길이 워낙 잘 나 있어서, 정말 큰 어려움 없이 오를 수 있었다. 진달래 대피소 이후로는 조금 달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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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부터, 100m 표지석을 빼고는 사진이 없어졌다... 그와중에 1,100고지는 어디감?

진달래 보호소에 도착하니 슬슬 허기가 졌다. 성판악 휴게소에서 사 온 김밥을 꺼내 먹으니 이게 또 별미다. 워낙 맛없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양도 많고 먹을만하다. 염분이 필요한 시점이다 보니 평소에 짠 걸 좋아하지 않는데도 술술 넘어간다. 역시 시장이 반찬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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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대피소에서 먹은 김밥. 솔직히 든 것도 없고 뭐 그런데, 맛있다. 진짜 맛있어.

오르는 동안에도 까마귀 소리를 종종 들었는데, 진달래밭 대피소에는 까마귀가 정말 많았다. 워낙 똑똑한 조류 중 하나라고 들어서 그런지 하는 짓 하나하나가 다 남달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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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가까이서 까마귀를 본 게 언젠지... 일단 다 잘생겼음...

밥도 먹었겠다, 까마귀랑 놀만큼 놀았겠다, 슬슬 정상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해발고도가 1,600m를 넘는 순간부터는 조금씩 녹지 않는 눈과 얼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중간에 멈춰 서서 아이젠을 끼고 오르니 이게 또 신세계다. 아이젠도 생에 처음으로 껴보는 건데, 이젠 평지보다 눈길이 더 편하다. 아무튼 아이젠 덕에 미끄러지지 않고, 눈꽃도 구경하며 산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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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으로 가는 길, 눈과 바람, 푸른 하늘이 만들어낸 풍경이 아름답다.


얼마나 지났을까, 역설적이게도 등산로가 너무 잘 닦여 있다 보니 힘들어지는 구간이 나타났다. 계단이 없으면 오르지 못했겠지만 개인적으로 계단을 오르내리는 게 유독 체력 소모도 심하고 무릎에 무리도 많이 가는지라 점점 체력의 한계가 느껴졌다. 멈춰 쉬는 횟수도 늘어나고, 점차 간격도 짧아졌다. 1,800 고지부터였나, 그때부터는 슬슬 입도 걸어지고 저질체력을 탓하며 욕하며 오르기 시작했던 것 같다. 포기하고 내려가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질 않았지만 제발 빨리 끝나기는 여러 번 바랐던 것 같다. 진짜 운동도 좀 하고, 건강도 좀 챙기고, 살도 좀 빼고, 그렇게 지금보다 더 건강해지고 말겠다 얼마나 다짐했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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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쉬면서 내려다본 풍경도, 올려다 보는 풍경도 모두 아릅답다. 게다가 길이 워낙 잘 정비되어 있어 오르기 좋다.


그렇게 자학과 자책과 좌절의 시간이 흐르고 흘러, 한 발 한 발 내딛다 보니 보인다, 끝이 보인다. 눈 앞에 보이는 계단이 점차 줄어들고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마지막 계단을 딛고 올라서 하늘과 내 발이 닿는 높이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렇게 한라산 정상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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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백록담을 볼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는데, 너무나도 감사하게도 하늘을 가득 담은 채,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아래 백록담이 우리를 맞이해줬다. 거친 바람소리보다 더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한참을 서서 바라본 것 같다. 몇 번이고 올라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고 또 했다. 백록담에 머물며 모든 순간이 행복했다. 백록담을 조카님에게 보여주려고 영상통화를 걸었는데 낮잠시간이라 보여주지 못한 것만 조금 아쉬웠을 뿐. 백록담을 실컷 즐기고 돌아보니 그제야 올라오면서 제대로 즐기지 못한 풍경들이 눈에 담긴다. 내려가면서는 조금 더 하늘을 바라보며 주변을 둘러보며 내려가야겠다 생각했다. 정상에 있을 때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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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록담의 아름다운 풍경.


하행길, 올라오면서 찍지 못한 1,100m, 1,700m 알림석을 찍어야 했고, 더 많은 풍경을 눈에 담을 생각이었다. 본래 산행은 하행길이 무릎에 더 무리도 가고 위험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조심하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한 동안은 그랬다, 눈길에 미끄러져 왼쪽 발목을 조금 접질리기 전까지는. 그나마 보호대도 했고, 스틱도 있고 친구들이 배낭이나 외투를 들어준 덕분에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지만 정상에서 생각한 것만큼 하늘을 더 자주 올려보거나 주변을 더 둘러보진 못했던 것 같다. 마지막 100여 미터가 그랬듯, 마지막 400m를 지나면서는 그저 빨리 등산화를 벗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다 우연히 또 고라니를 만나서 잠깐 힘을 얻고, 등산로 출입구가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하니 또 그간의 피로는 싹 다 잊히더라. 참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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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약 9시간이 넘는 산행이 끝났다. 정말 친구들 덕분에 이만큼 편하게 완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말로 형용하기 힘든 벅찬 감정과 동시에 너무나도 감사한 마음과 미안함 마음이 소용돌이처럼 몰아쳤다. 정말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산행이 일찍 끝난 덕분에 등산용품을 오늘 반납하기로 했다. 시내에 들렀다 가는 김에 산행 내내 울부짖었던(?) 스타벅스에 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진짜 흡입하고, 인천으로 돌아갈 때 꼭 사가야지 하며 벼르고 있던 굿즈들도 좀 샀다. 뭔가 뿌듯한 일을 했으니 셀프 선물 같은 느낌으로. 탈수 증상 때문에 숨도 조금 벅차고 가슴도 답답했던 게 아메리카노랑 탄산수를 들이붓고 나니 괜찮아지는 것 같다. 역시나 나는 플라시보 이펙트에 의존하는 타입인 것 같다.


딱 12시간, 집에서 출발해 도착할 때까지 12시간이 걸렸다. 집에 도착해서 개운하게 샤워하고 벼르고 벼르던 봉성식당에 다녀왔다. 흑돼지 근고기에 푸른 밤 한 잔. 산행 후에 먹는 돼지고기는 진짜 세상 어떤 식사보다 훌륭한 조합이다. 셋이서 6인분을 넘게 먹었던 것 같다. 오늘은 6개월 만에 처음으로 술도 한 잔 마셨다. 딱 한잔이었지만 오늘 하루의 화룡정점이 아니었나 싶다.

봉성식당은 한라산을 다녀왔다는 버프를 빼고 생각해도 참 맛있었다. 참기름에 묻힌 고사리가 매우 매력적이다. 나름 외진 곳에 있는데 금세 사람들이 꽉 찬다. 고기도 괜찮고, 밑반찬도 괜찮다. 점심 장사도 하신다고 하는데 한 번 가봐야겠다.


식당에서 밥을 먹는 중간에 집에 일이 생겨 급하게 인천을 다녀와야 할 일이 생겼다. 원래대로라면, 한라산을 다녀오는 일정을 고려해서 다음 주 월요일에 가면 되는 일정이었는데, 내일 새벽에 바로 비행기 타고 가서 일을 다 보고 올 수 있으려나... 근육통이 심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저녁까지 든든하게 먹었겠다, 슬슬 피로도 몰려오겠다, 내일 아침 일찍부터 움직여야 하니 이래저래 일찍 잘 준비를 해야겠다. 평소에 루틴하게 해오던 일들만 후딱 마무리하고, 혹시 모르니 파스나 여기저기 붙이고 자야겠다. 내일 하루도 잘 지나가길.


p.s. 성판악 코스의 중간에는 사라오름 탐방로를 갈 수 있는 갈림길이 있다. 오를 때는 일단 정상을 다녀오면서 생각하자고 하며 거절하고, 내려갈 때는 피곤해서 그냥 가자고 거절했다. 그때는 진짜 더는 못 가겠다 싶어서 칼같이 거절했는데, 지금 집에 와서 생각해 보면 다녀올 걸 그랬나 싶다. 그냥 나중에 한 번 더 한라산을 오를 이유를 남겨두고 왔다고 생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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