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16일 월요일

by 모조

열여섯 번째 날이다. 어느새 세 번째 월요일. 2주를 함께 한 친구들과 함께 하는 마지막 밤.


오므라이스 해주고 남은 베이컨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지난밤부터 아침에 일어나면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비슷한 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잠에서 깨 주방으로 기어 나와 삼겹살 베이컨 대신 목살 베이컨을 굽고, 긴 소시지 대신 비엔나 소시지를 굽고, 스크램블드 에그 대신 써니사이드업 계란 프라이를 하고, 쥬키니 대신 애호박, 양송이 대신 새송이, 토마토 대신 대추방울토마토로 플레이트를 꾸몄다. 이렇게 해놓고 보니 봐줄만하네. 괜춘해. 맛도 있어. 훌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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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빈 통조림을 하나 사둘걸 그랬나...?


조카님을 맞이 하기 위해 주문했던 담요와 패드가 도착했다. 매번 아침 7시면 택배들이 도착해서 좋다. 의도치 않게 새벽배송 혜택을 누리는 중. 근데 제일 중요한 텐트가 아직 안 왔다. 쇼핑몰 앱에는 배송완료라는데, 늦어도 내일이면 도착할 걸 알고 있지만, 조카님을 위한 거니 더블 체크가 필요했다. 이메일 문의도 해보고 대한통운 앱도 깔아봤지만 배송완료는 커녕 그저 배송 중일뿐이다. 젠장, 이게 제일 중요한 건데.


아기 거는 중성세제를 써야 한다고 해서 급하게 울샴푸를 사 왔다. 유기농 세제도 같이 주문했어야는데... 역시 아직 서툴다. 아기 담요랑 패드 빨고 나서는 수건들도 중성세제로 빨아야겠다. 조카님 덕분에 수건도 한결 부드러워지겠구나.


평소보다 조금 이른 점심을 먹기 위해 애월로 향했다. 친구들이 함께 하는 마지막 점심이라고 스시애월에서 초밥을 사주기로 했다. 친구들이 제주에 오기 전부터 얘기했던 초밥집이었는데, 그냥 아무 때나 오면 될 줄 알았더니 예약이 꽤나 치열한 곳이었다. 아무튼 가능한 시간이 11시와 3시라서 11시로 예약했다. 아마 도쿄 여행 가서 츠키지 시장에서 아침 9시, 10시에 초밥 먹었던 이후로 제일 이른 시간에 먹는 초밥이 아닌가 싶다. 친구 덕에 또 호사를 누렸다.

명확하게 가성비를 중시하는 스시야다. 효율성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매력적인 옵션이 될 수 있다. 가격도 서비스 속도도 매우 경제적이다. 만약 샤리(초밥에 사용하는 밥)의 간이 센 걸 선호하지 않는다면 피하는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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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시애월 도로 오마카세 코스.


애월까지 나와 외식을 한 김에 디저트도 먹고 가기로 했다. 아이언맨 도넛으로 유명한 랜디스 도넛! 매장 입구부터 단 냄새가 자욱하다. 대학교 1학년 때, 신촌에 있는 크리스피 크림 도넛 매장에 빨간 불이 켜진 걸 보고 들어갔을 때 맡았던 그 향이다. 달달구리 세계의 향. 오늘 먹을 도넛과 조카네가 놀러 왔을 때 같이 먹을 도넛까지 한 아름 준비했다. 도넛을 한 아름 들고 2층 카페에 올라가 커피 앤 도넛과 아름다운 애월 바다를 보며 영국찻집을 꼭 가보자고 다짐했다. 왜지.. 왜 먹으면서 먹을 생각을 한 거지. 근데 도넛 맛있네... 계속 먹게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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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디스 도넛을 두 상자나 들고 있으니 세상 다 얻은 기분이다. 아주 잠깐은.
20200316_124002.jpg 바닷가만 나오면 바람과 함께 한다. 저 멀리 애월 카페거리도 보이는데, 저기 있는 분들은 얼마나 추울까...

바람은 차지만 햇살은 따듯한 날이라 일단 집에 도넛을 두고 다시 나오기로 했다. 그리고 두 번째 만에, 친구들은 삼고초려 끝에 영국찻집에 자리를 잡았다. 외관만 보고는 그저 인스타그램에 인증샷 남기기에만 좋은 공간일 거라 생각했는데, 주문과 서빙을 담당하는 주인, 혹은 직원분을 보자마자 생각이 바뀌었다. 옥스퍼드 셔츠에 치노바지를 정갈하게 입고, 자신의 룰에 맞춰 가게를 운영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홍차에 대해선 잘 모르기에 맛을 평가하기엔 조심스럽지만, 지불한 돈만큼의 가치는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사진 찍기 좋은 곳들도 많고, 테이블 간 간격이 멀어 대화를 나누기도 좋다. 한 번 더 가고 싶어 지는, 매력적인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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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성리 명소, 영국찻집. 생각했던 것보다 매력적이라 자주 오게 될 듯 하다.


찻집에서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가는 길, 봉성리 봄 입구에서 인디언 인형을 발견했다. 마침 인디언 텐트가 내일 오니까 저 인형을 사다 놓으면 꽤 괜찮은 페어링이 될 것 같다. 내일 오전에 가서 한 번 더 자세히 봐야겠다.


봉성돌담집의 매력 중 하나는 집 뒤편에 마려된 노천탕이다. 그 노천탕을 여기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의 반이 지나서야 열었다. 날이 추워서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혹시나 날이 따듯하고 좋으면 조카님이 물에서 놀 수 있게 하기 위해 뚜껑을 열고 청소를 시작했다. 물로 한 번 헹구고, 솔로 닦고, 또 물로 헹구고, 솔로 닦아 내기를 여러 번,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물을 받아 놀 수 있을 만큼 깨끗하게 정리했다. 깨끗해진 바닥을 보니 뿌듯하다. 날이 조금만 더 따듯해지길, 바람이 조금만 더 잦아 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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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를 마치고 어도오름을 올랐다. 바람이 세게 불어도 햇빛만 좋으면 산책 다니기 참 적당한 곳이다. 이제는 같은 방향으로만 돌지 말고, 정방향 역방향 섞어 가면서 도는 횟수를 조금 더 늘렸다. 도는 방향만 바꿨을 뿐인데 바라보는 풍경이 달라지니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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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늘에 선명하게 무지개가 피었다. 완벽한 타원 모양은 아니었지만, 무척이나 짧고 밝은 무지개였다. 이런 거 보면 아직도 괜히 설렌다.

오름에 다녀와서 분리수거까지 하고 나니 저녁 먹을 시간이다. 미리 장을 봐 둔 '순두부찌개'와 '고추장찌개' 중에 순두부찌개로 셋이 함께 하는 저녁 식사 메뉴를 정했다. 라면도 그렇고, 이런 찌개도 그렇고... 항상 처음에 물을 따른 게 정량이다. 시험 문제도 애매한 문제는 처음 감이 와서 찍은 게 답인 것처럼 물이 조금 적어 보여도 더 따르면 안 된다... 차라리 많아 보이면 버리는 건 상관없지만 적다고 더 부으면 꼭 실패한다. 이날 저녁이 그랬다. 마지막으로 대접하는 밥이랍시고 맛있게 하려고 바지락도 넣고, 힘을 많이 줬건만 순두부찌개는 어디 가고 순두부가 들어간 국이 차려졌다. 하... 순두부찌개 연습 좀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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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이 함께 하는 마지막 밤, 조촐한 술자리가 열렸다. 술을 못 마시는 터라 탄산수로 대체했지만, 텐션만큼은 술을 마신 친구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2주, 함께 지내기에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도움받았던 일들만 생각나 한없이 고마운 시간들이었다. 이렇게 함께 하우스메이트로 지낼 수 있는 기회가 또 생길지 모르겠기에 더 소중하고 값진 시간들. 셋이서만 공유할 수 있는 몇몇 순간들, 아마 앞으로 평생 추억할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혼자 쉬러 왔다곤 하지만, 혼자 있었으면 이렇게 풍성하게 쉬면서 에너지를 채우진 못했을 거다. 언제나 그렇듯, 이게 마지막은 아닐 거기에, 내일 또다시 함께 할 것처럼 평범하게 그렇게 마지막 밤을 보냈다.

2주간, 제주에서, 이 돌담집에서, 나의 제주집에서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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