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29일 토요일

by 모조

스물아홉 번째 날, 제주에 온 이래 가장 많은 사람들과 함께 왁자지껄하게 보낸 하루.


토스트와 과일을 한상 차렸다. 친구들이 배낚시를 떠날 예정이라 무겁진 않아도 든든하게 먹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토스트에 계란 프라이 하나 얹고, 시리얼과 사과, 키위, 방울토마토로 비타민도 제대로 갖췄다. 사과는 껍질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 반반 준비했다. 세심한 사람 코스프레 성공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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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이 떠난 후, 거실에 앉아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모여봐요, 동물의 숲>을 하다 잠시 게임기를 손에서 내려놓았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Meditation app, black mirror: Smithereens 삽입곡)과 새소리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새들이 이 노래를 들으면서 지저귀는 것만 같은 오전이다. 노래가 끝나고 새소리가 멈춘 후에야 집을 나설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잔상이 오래 남을 것 같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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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읍내(?)에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버스 시간에 맞춰 버스에 오르고, 읍내에 도착했다. 아침에 급하게 찾아낸 동네 식당에서 브라운소스를 베이스로 한 제주 돼지 로스카츠(진짜 맛있게 먹었다. 흑돼지 돈카츠 한 번 먹으려고 했는데 성공적!)를 먹고, 로컬 로스터리 카페인 리틀 로컬에 들러 마지막 원두를 사고, 파리바게트에 들러 아침에 먹을 식빵들을 샀다. 로컬 베이커리가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식빵보다는 다 다른 유형의 빵(인스타에 올릴만하거나, 달달하거나)을 팔고 있어 어쩔 수 없이… 파리바게트의 빵을 골랐다.

날이 참 좋았다. 햇살도 따듯하고 바람도 적당했다. 다른 때 같으면 집 밖으로 나온 김에 카페라도 하나 더 방문해서 시간을 좀 보냈을 텐데 그러질 않았다. 집이 너무 좋아서 굳이 그럴 이유를 못 찾았다. 버스 시간에 칼 같이 맞춰 정류장에 도착해 집으로 오는 버스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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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성이 어딘가(좌)와 동네 돈카츠 집에서 먹은 로스카츠. 맛있었다.

집에 오자마자 야외 욕조를 청소했다. 비가 오는 동안 모여있던 빗물을 빼내고, 깨끗해진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근데 이거 도대체 언제 다 받아지는 걸까? 1시 30분쯤 시작했는데, 언제쯤 다 받아지는지 지켜봐야겠다. (결국 물 받는데 3시간 반이 넘게 걸렸다. 내일은 5시나 6시쯤 받기 시작해야겠다.)


한참을 기다리다 지쳐 물을 틀어 둔 채로 오름으로 향했다. 날이 좋지 않아도 요즘 들어 매 순간, 매 걸음이 다 그렇지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산책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는 <킹덤>의 생사초랑 비슷하게 생긴 보라색 꽃도 발견했다. 안 그래도 진짜 실존하는 꽃이라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그런지 이상하게 눈길이 더 간다. 게다가 그렇게 좋았던 날이 흐려진 후라 그런지 뭔가 느낌적인 느낌이 킹덤스럽다.

... 잠시 삼천포로 빠졌는데, 모든 게 다 새롭고 소중하다. 이런 나무가 있었나, 이런 풀이 있었나, 여기서 바라보는 풍경이 이렇게 아름다웠나. 마음의 준비라는 게 다른 게 아니라 이런 건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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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왁자지껄하게 사람들이 모였다. 오늘 같이 지내기로 한 친구들이 다 모이자마자 양옥집으로 구경을 떠났다. 들어간 순간 양옥집을 빌려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양옥집은 양옥집만의 멋이 있었다. 일단 테이블이 크고 식기가 많아서 너무 좋다. 다 같이 놀기 충분할 거 같다. 방도 많다. 게스트님들을 편안하게 모시기에 부족함이 없다. 여기는 두 세 가족이나 커플이 같이 와서 쉬어도 참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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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물이 들어가서 노천욕을 즐길 만큼 받아졌다. 지난번에 사둔 프렌치 바닐라 배쓰 오일을 엄청 많이 뿌리고, 의자 용도로 놓여있는 감귤 상자에 타월을 깔고 맥북과 스피커를 갖다 뒀다. 냉장고에서 꺼낸 시원한 탄산수가 까지 세팅하고 드디어 입수!

이건 진짜 신세계다. 그때 형님들이 왜 그리 추천하셨는지 알겠더라. 날이 좀 추워도 종종 즐길 걸 그랬다. 친구들한테도 더 강력하게 추천할 걸 그랬다. 진짜 너무 좋았다. 그냥 따듯한 물에 들어가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여기에 친구가 추천해준 유튜브 영상(French Kiwi Juice의 우유니 사막 라이브 영상이었다.)과 Beoplay A1, 탄산수까지 곁들이니 어마 무시한 경험이었다. Unreal, 그 자체였다.
처음에는 혼자 즐기고 있었는데, 혼자 즐기기 너무 아까워서 친구들도 초대했다. 모두가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들어온 친구들은 진짜 후회 안 했을 거다. 아마 제주에 머물렀던 시간 중 제일 기억에 남는 순간이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에 홀로 남아 사카모토 류이치 선생님의 노래들을 틀었다. 'Merry Christmas, Mr.Rolens'가 흘러나오고, 은은하게 남은 라벤더향, 얼굴을 간지럽히는 바람, 따듯한 물까지, 이 모든 게 현실감각을 잃어버리게 할 만큼 낙원이었다. 일부러 욕조에 물을 받길 잘했다 싶다. 청소한 보람이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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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nch Kiwi Juice Live DJing 영상 링크 : https://youtu.be/sCNlt5nvSI8


마지막으로 봉성식당을 찾았다. 댕댕이가 친근하게 다가가려고 하니 다른 테이블의 아저씨가 성을 내신다. 어디 감히 댕댕이가 사람이 밥 먹는데 다가오냐는 이야기셨다. 그분이 살아온 세계는 그런 세계였다는 걸 알면서도 아저씨의 성에 댕댕이가 겁을 먹는 걸 보니 마음이 편하질 않다. 기분 풀어주려 일부러 나가서 같이 놀아주는데 확실히 평소와는 달랐다. 그래도 여전히 개방정 떨고 순하고 착한 건 변하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다. 사람이 문제다, 아니 인간이 문제야.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 사장님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조심히 돌아가라는 따듯한 인사말에 마음이 따듯해졌다. 한 달 머물면서 다섯 번 들렀지만 매번 만족스러웠다. 여기서 먹었던 고기랑 고사리, 함께 놀았던 댕댕이, 사람들까지 다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양옥집에서 수다 한 판을 벌였다. 사람이 많다 보니 다양한 술이 올라왔다. 카스, 크래프트 세종 비어, 리즐링(KUNGFU GIRL) 화이트 와인, 다시 카스. 음식도 다양하다. 안주 부족할까 걱정했는데 차고 넘쳤다.


술자리가 한창이던 때, 몇 가지 물품을 가지러 한옥으로 돌아왔다. 항상 마당을 통해서 들어오거나, 불이 꺼진 집으로 걸어 들어왔었는데, 양옥집을 통해 한옥집을 바로 가로질러 오다 보니 새롭다. 이상하게 더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정이 엄청나게 많이 들었나 보다. 기분 좋은 아련함? 그리움?,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니 말이나 글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그런 순간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몇 번을 더 오갔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이 순간을 여러 번 경험하고 싶어서.


양옥집은 묘한 매력이 있다. 너무나도 고요한 시골 마을, 그냥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양옥집 하나가 있다. 무척이나 평범해 보이는 그 집의 문을 여는 순간 세상이 달라진다. 마치 시공간을 이동하는 포털이 열리는 것만 같다. 그 안에는 즐겁게 수다를 떠는 사람들이 있고, 따듯하고 차분한 음악이 있다. 마치 정신과 시간의 방처럼, 현실세계에서 잠시 벗어나 타임캡슐, 혹은 별도의 시공간으로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매력적인 공간과 사람이 있을 경우에만 가능해지는 경험이다. 오랜만에 그 잔상이 오래도록 남아 너무 행복하다. 시간도 참 잘 간다. 특별한 얘기는 없으나 다양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진짜 금세 흘렀다. 함께 하는 시간이 주는 놀라운 경험이다. 정신의 시간의 방은 존재한다, 우리 주변에 분명히 존재한다.


친구들을 양옥집에 다 재우고 홀로 한옥집에 남아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집을 둘러보다 보니, 예전에 동생 내외가 간 후에 그랬던 것처럼, 공간 하나하나에 남은 잔상이 눈 앞에 펼쳐진다. 한참을 멍하니 거닐었다. 마치 무슨 박물관이나 미술관이라도 구경하는 것처럼, 한 걸음 내딛고 한 곳을 한참 바라보고, 또 한 걸음을 옮겼다. 그 한 걸음 한 걸음 추억을 떠올리며 한참을 그렇게 돌고 또 돌았다. 이 곳을 카메라에 정성스레 담아두고 싶어 졌다. 짐 정리를 그만두고, 간단히 청소만 한 채로 남겨뒀다. 정리는 내일 다시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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