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덟 번째 날. 마지막 토요일이자 새로운 친구들이 찾아오는 날. 마지막이자 새로운 토요일.
생각보다 피곤이 밀려오는 아침이었다. 별거 아니지만 그제 일정이 고되긴 했던 것 같다. 조만간 따듯한 물에서 몸을 푹 잠그고 나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가 오는 탓에 어두운 날씨도 영향을 끼친 거겠지.
비 오는 날이니까, 빌리 아일리시의 노래를 들으며(무슨 연관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침을 준비했다. 아침에 침대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비 오는 날은 참 좋은 날이다. 차창 밖에서 들리는 빗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잔잔한 음악이 잘 어울리고, 커피 원두를 그라인딩 하는 순간부터 커피 향이 온 집안을 가득 채우기 때문에 저절로 힘이 난다. 그래서 비 오는 날이 참 좋다. 조금 더 차분해지고 느긋해지고 여유로워지는 날이라 좋다. 출근을 안 한다는 조건하에서는 말이다.
아무튼 오랜만에 냉장고를 비우기 위해 토스트 한 빵 한쪽에는 홀 그레인 머스터드 위에 치즈랑 샌드위치 햄을 얹고, 다른 한쪽에는 크림치즈와 계란 프라이를 얹었다. 따로따로 먹어도 맛있고, 샌드위치처럼 합쳐 먹어도 맛있다.
아침 식사 후에 친구들을 맞이하기 위해 청소를 하고 동물의 숲을 하면서 시간을 때웠다. 어도초등학교 초입에 도착했다는 연락에 마중을 나갔다. 마지막 날까지 함께 할 친구들이라 그런지 괜히 더 반갑다.
간단히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짐을 풀던 중에 친구들이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건넸다. 어떻게 놀러 오는 길에 선물을 사다 줄 생각을 다 하는지, 게다가 어쩜 이리 평소에 쓰는 것들이 가득 담긴 선물을 고를 수 있는지, 정말 인복 하나는 어마 무시한 것 같다. 감사한 마음으로 잘 살아야겠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시간 맞춰해 둔 따듯한 밥과 밑반찬들로 가볍게 점심을 차렸다. 선물에 대한 보답이라고 하기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맛있고 든든하게 한 끼를 나눌 수 있어 좋았다.
어느 새부턴가 공식 코스처럼 짜인 산책로를 함께 했다. 마침 영국 찻집에 관심이 있는 것 같아 이번에는 가볍게 오름을 한 바퀴 돈 후에 영국 찻집으로 가서 차를 한 잔 함께 했다. 두 공간 모두 좋아해 주니 나도 좋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동안에도 많은 사람들이 오갔는데, 그중에서 빨간색 폰트와 연한 데님 색의 merci 에코백을 멘 커플이 기억에 남는다. 찻집에 들어왔는데 주인분이(항상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지금은 자리가 없습니다, 다음에 방문해주세요.”(찻집 안에 머물고 있는 고객들이 온전히 자신의 시간을 즐길 수 있게 더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거라 생각하는 지라 매우 멋진 자세라고 생각한다.)라고 하니 아쉬움을 가득 안고 떠나셨다. 분명히 출구 방향으로 걸어가고는 있는데, 한걸음 한걸음이 얼마나 무겁던지, 자리를 비워드리고 싶을 정도로 아쉬워하는 게 느껴졌다. 그 커플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옆자리가 비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5분만 사진 찍어주면서 기다렸으면 원하던 걸 즐기고 가셨을 텐데 아쉽다. 이 동네에 딱히 관광지라곤 이곳밖에 없기에, 일부러 찾아온 걸 알기에 더 아쉬웠다.
친구들과 같이 초밥 호시카이를 갔다. 처음에는 혼자 갈 계획이었다. 제주에서 제일 좋아하는 스시야이긴 하지만, 가격이 가격이다 보니 함부로 같이 가자는 말을 꺼내기 조심스러운 곳이라 얘기를 못 꺼내고 있었다. 근데 마침 친구들이 갈까 말까 고민하던 스시야가 호시카이라는 얘기를 듣고 바로 같이 가자고 했다. 좋은 건 같이 하면 더 좋으니까.
1년여 만에 다시 찾은 호시카이는 여전히 훌륭한 오마카세를 내놓았다. 안성현 셰프님이 이끌어가는 오마카세의 템포도 적당했고, 개별적인 요청사항도 신경 써 주시는 게 좋다. 친구들도 꽤나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아 더 기분이 좋았다. 지난번에 점심 코스로 먹은 후에 다음에 저녁에 오시면 배부르게 한상 차려주겠다고 하신 말에 일부러 저녁으로 왔는데 앙코르 같은 거 안 해도 될 만큼 정말 푸짐하게 배부르게 먹었다. 다음에도 제주에 오면 호시카이는 꼭 왔다 갈 거다.
집에 돌아와서 술잔을 기울이며 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눴다. 아무래도 비슷한 또래이다 보니 이래저래 고민의 포인트들이 겹치는 부분들이 많다. 어쩌다 보니 중간에 개인적인 한풀이 비슷하게 흘러간 것 같아 미안한 와중에도 이 모든 걸 들어주고 같이 고민해주고 의견을 주는 친구들이 있다는 건 참 복 받은 일이다. 조금 달라진 줄 알았는데 여전히 겁도 많고, 내가 다 알고 있고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듯한 말들이 마구 튀어나온다. 이건 진짜 조심해야 한다. 말 한마디 한 마디의 힘과 무게를 조금 더 진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지하게 고민을 들어주고 솔직한 의견을 내줄 수 있는 친구들일수록 더욱더 조심하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걸 깨닫는 밤이다.
정리하고 잠을 자려 가는 중에 가족 카톡방이 울렸다. 조카님이 두 손을 모두 놓고 혼자서 한 걸음, 두 걸음 떼는 게 담긴 영상이다. 괜히 또 울컥한다. 제주에 왔을 때 열심히 돌아다닌 게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놀러 오라고 하길 잘했다. 조카님은 이렇게 또 성장했다. 걸음마 기념 선물도 빨리 사야겠다. 돌아가서 만나면 막 뛰어오지 않을까, 그럼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