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28일 토요일

by 모조

스물여덟 번째 날. 마지막 토요일이자 새로운 친구들이 찾아오는 날. 마지막이자 새로운 토요일.


생각보다 피곤이 밀려오는 아침이었다. 별거 아니지만 그제 일정이 고되긴 했던 것 같다. 조만간 따듯한 물에서 몸을 푹 잠그고 나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가 오는 탓에 어두운 날씨도 영향을 끼친 거겠지.


비 오는 날이니까, 빌리 아일리시의 노래를 들으며(무슨 연관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침을 준비했다. 아침에 침대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비 오는 날은 참 좋은 날이다. 차창 밖에서 들리는 빗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잔잔한 음악이 잘 어울리고, 커피 원두를 그라인딩 하는 순간부터 커피 향이 온 집안을 가득 채우기 때문에 저절로 힘이 난다. 그래서 비 오는 날이 참 좋다. 조금 더 차분해지고 느긋해지고 여유로워지는 날이라 좋다. 출근을 안 한다는 조건하에서는 말이다.

아무튼 오랜만에 냉장고를 비우기 위해 토스트 한 빵 한쪽에는 홀 그레인 머스터드 위에 치즈랑 샌드위치 햄을 얹고, 다른 한쪽에는 크림치즈와 계란 프라이를 얹었다. 따로따로 먹어도 맛있고, 샌드위치처럼 합쳐 먹어도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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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 후에 친구들을 맞이하기 위해 청소를 하고 동물의 숲을 하면서 시간을 때웠다. 어도초등학교 초입에 도착했다는 연락에 마중을 나갔다. 마지막 날까지 함께 할 친구들이라 그런지 괜히 더 반갑다.


간단히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짐을 풀던 중에 친구들이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건넸다. 어떻게 놀러 오는 길에 선물을 사다 줄 생각을 다 하는지, 게다가 어쩜 이리 평소에 쓰는 것들이 가득 담긴 선물을 고를 수 있는지, 정말 인복 하나는 어마 무시한 것 같다. 감사한 마음으로 잘 살아야겠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시간 맞춰해 둔 따듯한 밥과 밑반찬들로 가볍게 점심을 차렸다. 선물에 대한 보답이라고 하기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맛있고 든든하게 한 끼를 나눌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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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새부턴가 공식 코스처럼 짜인 산책로를 함께 했다. 마침 영국 찻집에 관심이 있는 것 같아 이번에는 가볍게 오름을 한 바퀴 돈 후에 영국 찻집으로 가서 차를 한 잔 함께 했다. 두 공간 모두 좋아해 주니 나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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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머물고 있는 동안에도 많은 사람들이 오갔는데, 그중에서 빨간색 폰트와 연한 데님 색의 merci 에코백을 멘 커플이 기억에 남는다. 찻집에 들어왔는데 주인분이(항상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지금은 자리가 없습니다, 다음에 방문해주세요.”(찻집 안에 머물고 있는 고객들이 온전히 자신의 시간을 즐길 수 있게 더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거라 생각하는 지라 매우 멋진 자세라고 생각한다.)라고 하니 아쉬움을 가득 안고 떠나셨다. 분명히 출구 방향으로 걸어가고는 있는데, 한걸음 한걸음이 얼마나 무겁던지, 자리를 비워드리고 싶을 정도로 아쉬워하는 게 느껴졌다. 그 커플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옆자리가 비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5분만 사진 찍어주면서 기다렸으면 원하던 걸 즐기고 가셨을 텐데 아쉽다. 이 동네에 딱히 관광지라곤 이곳밖에 없기에, 일부러 찾아온 걸 알기에 더 아쉬웠다.


친구들과 같이 초밥 호시카이를 갔다. 처음에는 혼자 갈 계획이었다. 제주에서 제일 좋아하는 스시야이긴 하지만, 가격이 가격이다 보니 함부로 같이 가자는 말을 꺼내기 조심스러운 곳이라 얘기를 못 꺼내고 있었다. 근데 마침 친구들이 갈까 말까 고민하던 스시야가 호시카이라는 얘기를 듣고 바로 같이 가자고 했다. 좋은 건 같이 하면 더 좋으니까.

1년여 만에 다시 찾은 호시카이는 여전히 훌륭한 오마카세를 내놓았다. 안성현 셰프님이 이끌어가는 오마카세의 템포도 적당했고, 개별적인 요청사항도 신경 써 주시는 게 좋다. 친구들도 꽤나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아 더 기분이 좋았다. 지난번에 점심 코스로 먹은 후에 다음에 저녁에 오시면 배부르게 한상 차려주겠다고 하신 말에 일부러 저녁으로 왔는데 앙코르 같은 거 안 해도 될 만큼 정말 푸짐하게 배부르게 먹었다. 다음에도 제주에 오면 호시카이는 꼭 왔다 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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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와서 술잔을 기울이며 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눴다. 아무래도 비슷한 또래이다 보니 이래저래 고민의 포인트들이 겹치는 부분들이 많다. 어쩌다 보니 중간에 개인적인 한풀이 비슷하게 흘러간 것 같아 미안한 와중에도 이 모든 걸 들어주고 같이 고민해주고 의견을 주는 친구들이 있다는 건 참 복 받은 일이다. 조금 달라진 줄 알았는데 여전히 겁도 많고, 내가 다 알고 있고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듯한 말들이 마구 튀어나온다. 이건 진짜 조심해야 한다. 말 한마디 한 마디의 힘과 무게를 조금 더 진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지하게 고민을 들어주고 솔직한 의견을 내줄 수 있는 친구들일수록 더욱더 조심하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걸 깨닫는 밤이다.


정리하고 잠을 자려 가는 중에 가족 카톡방이 울렸다. 조카님이 두 손을 모두 놓고 혼자서 한 걸음, 두 걸음 떼는 게 담긴 영상이다. 괜히 또 울컥한다. 제주에 왔을 때 열심히 돌아다닌 게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놀러 오라고 하길 잘했다. 조카님은 이렇게 또 성장했다. 걸음마 기념 선물도 빨리 사야겠다. 돌아가서 만나면 막 뛰어오지 않을까, 그럼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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