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진짜예요.
최근에 사고 싶었던 LEGO(이하 '레고')를 하나 샀습니다. 처음 출시했을 때 타이밍을 놓쳐 못 샀던 모델이라 재입고된 걸 보고는 주저하지 않고 무이자 할부 찬스를 썼습니다. 그렇게 결제를 하고 나서야, 레고 홈페이지에서 상품 세부 설명을 차근차근 읽기 시작했습니다. “예쁘다, 사길 잘했다, 이거 너무 좋다.”하면서 스크롤을 내리다 잠시 멈칫했습니다. "폭이 1미터가 넘을 뿐 아니라"... 1미터?
모니터에서 고개를 돌려 제 방을 쓰윽 둘러봤습니다. 1m의 무언가가 들어갈 공간은 보이질 않더군요. 이미 수많은 레고와 책과 수집품으로 가득 찬 이 방엔 가로 1m의 무언가를 허락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하질 않았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레고가 엄청난 고급 취미라는 걸요. 레고 브릭도 어느 정도 가격대가 있고(제가 산 레고 중에 제일 비싼 건 64만 원이었죠.), 먼지가 내려앉지 않게 하기 위한 진열장을 구매하는 것도 돈이 들지만(원하는 사이즈로 주문 제작하다 보면 20~30만 원이 훌쩍 넘습니다), 무엇보다 조립한 레고를 진열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 무엇보다 내 방, 혹은 내 집, 아니면 창고라도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저 같은 소시민은 레고를 취미로 삼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더군요. 이런 이야기를 친구랑 주고받는 데 친구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친구 : "골프 치려면 차 사야 하는 거랑 비슷한 건가ㅋㅋㅋㅋㅋㅋ"
그 말에 격하게 공감하던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 "맞아, 라운딩 피랑 골프용품도 비싸긴 하지만, 그것보다는 골프장에 갈 수 있는 차가 있어야지ㅎㅎㅎ"
그리고 덧붙였습니다.
나 : “근데 레고는 무려 집이 있어야 해. 심지어 자가로. 이사하는 게 어마 무시하게 피곤한 일이거든,
내가 올해 해봐서 알아. 그러니 자가가 아니면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해. 이게 내가 올해 배운 거야.”
친구 : “레고 버로우의 공격 사고 싶었는데, 참야야겠네ㅋㅋㅋㅋ”
그 순간 제 머릿속에서 번쩍 하며 떠오른 문장이 있습니다.
레고가 골프보다 비싼 취미네!
그렇습니다.
레고는 골프보다 고급 취미입니다. 집이 있어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취미니까요.
끝.
어린 시절부터 블록을 갖고 노는 걸 좋아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레고를 동경해왔죠. 어린 시절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 중에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게 처음 선물 받은 레고일 정도로 좋아합니다. 초등학생 때 레고를 사주신다는 말에 신나서 따라간 마트에서 X-wing 파이터(LEGO 7140)를 골랐는데, 이게 제 생에 첫 레고였습니다. <스타 워즈>를 보기 전이었지만, 어린아이의 눈에 X-wing이 너무 멋있었나 봅니다.(사실 서른이 넘은 지금 봐도 멋있습니다, X-wing은)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거 엄청 비쌌을 텐데… 이미 초등학생 때부터 타고난(?) 등골 브레이커였나 봅니다.
선물 받은 날 바로 조립해서 거실 진열장에 올려두었을 때 얼마나 뿌듯하던지. 종종 날개를 X 모양으로 펼치고 온 집안을 뛰어다니고 싶었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차마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집에 놀러 온 어린 사촌동생들은 종종 그렇게 놀았던 것 같네요. 그러던 어느 날, 학교를 다녀온 사이, 어린 사촌 동생들이 X-wing을 산산조각 냈더군요. 거기다 애정 하는 R2-D2 피겨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나중에 이사하려 짐을 들어내다 보니 무슨 가구 밑에서 다리가 한쪽이 부러진 채 나타나긴 했습니다. RIP.) X-wing이 산산조각 났던 날, 남몰래 숨어서 분노를 삭이며 눈물을 흘렸던 것 같네요.
그렇게 큰 슬픔(?)을 간직한 채 한동안 레고와 떨어져 지냈습니다. 거의 20년 가까이 레고를 조립할 기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근무 중인 회사가 사무실을 용산역으로 옮기면서부터 다시금 레고와 가까워졌습니다. 용산역에는 국내에 몇 개 없는 레고 스토어가 있었고, 그 무렵부터 레고는 제가 좋아하는 IP와 컬래버레이션을 한 제품들을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MARVEL, Harry Potter, DC와 같은 IP들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점심시간에 산책 겸 레고 스토어를 돌아다니다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10만 원 미만의 조그마한 레고들을 하나 둘 사기 시작했습니다. 어차피 이미 다른 수집품들로 방이 가득 차 있었기에 Creator Expert 시리즈를 하나 둘 사고 싶어도 그만한 크기의 레고를 둘 곳이 없었습니다. 대형 블록들은 그저 그림의 떡 같은 존재였죠.
이렇게 소소하게 레고를 즐기던 와중에 드디어 그 제품이 나타납니다.
LEGO 71043, Hogwarts Castle.
이전까지 저와 레고 사이에 놓여 있던 몇 개의 벽이 한순간에 무너졌습니다. 이게 얼마나 큰 지, 가격은 얼마인지는 더 이상 고려할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무조건 사야 했습니다. 온라인 스토어에서 선구매가 열리자마자 뒤도 보지 않고 바로 구매했습니다. 그리고 이틀 동안 20여 시간을 들여 호그와트 성을 완성했습니다.
이때부터 고삐가 풀렸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무언가가 레고로 눈 앞에 놓여있는 걸 보는 게 너무 행복했습니다. 게다가 64만 원짜리를 한 번 사고 나니 이전에 비싸게 느껴졌던 레고들도 ‘이 정도면 가격이면 살만한데?’가 되어버렸죠. 그래서 스타벅스 머그나 텀블러, 책 같은 다른 수집품보다 레고에 집중했습니다. 해리포터 시리즈, 마블(아이언맨 중심), DC(배트맨 중심), Creator Expert 카테고리의 제품들을 하나하나 사들였죠.
근데 참 신기한 게, 레고가 제가 좋아하는 애들만 골라서 협업을 하더군요. 앞에서 언급한 IP들은 물론이고, 최근에 스포츠팀 중에 제일 먼저 협업한 팀이 최애팀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더군요. 어쩌겠어요. 올드 트래포드도 사야죠. 꿈의 구장인데, 그 판타지를 제 방에 둘 수 있는데 안 살 수가 있나요.
그렇게 하나하나 지르다 보니 진짜 다이애건 앨리를 둘 자리가 없네요. 이걸 어디에 둬야 할지 제 방을 새하얀 백지라고 생각하고 곰곰이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아마도 책장에 있는 책들을 창고로 조금 밀어내고, 그 자리에 둬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다이애건 앨리만 사고 이제 그만 살까 했는데, 이번에 글을 쓰다 보니 X-wing 파이터를 어떻게든 구해봐야겠다는 생각도 번뜩 드네요. 그걸 사면 어디에 둬야 하나 또 오늘 같은 고민을 하겠지만, 그건 그때 다시 답을 찾으면 될 듯합니다. 그리고 또다시 해결책을 찾아내겠죠.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진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