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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숫자를 좋아하지만 수학을 못 하는 사람

나는 사실 글자보다 숫자를 좋아했다. 그렇지만...

by 목컴

(2021년 7월 16일 블로그 작성 글을 옮겨적되 현재의 나를 빌려 고칠 곳은 고쳤다.)


어릴 적부터 숫자에 관심이 참 많았다. 수와 글 모두 좋아했는데, 똑똑해서가 아니라 그냥 호기심이 많았던 기억이다. 짧은 글을 짓는 것도 좋아했지만 글보다도 숫자의 변화에 지대한 호기심이 있었던 것은 명약관화하다. 문제는 나의 호기심에서 기인한 취미와 나의 머리가, 다시 말해 재능이 불일치했다는 것. 고등학교 때까지 다른 과목에 비해서 늘 고전했던 과목이 수학이었고... 대입 논술에서도 수리논술은 아예 손도 못 댔었고... (물론 그 시험이 불닭볶음면 매운맛 수준의 난이도긴 했지만) 수리영역은 모의고사 20점대 맞아본 적도 있으니 말 다 했지.


나랑 가까운 사람들은 내가 숫자보다는 글자와 친한 사람으로 대부분 생각한다.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나의 기원(?)은 분명히 숫자였음을 이 자리를 빌려 밝혀두고 싶다. 지금 데이터 분석 업무를 하게 된 것도, 결국은 돌고 돌아 나의 본연적 호기심으로 되돌아온 것뿐이어서 개인적으로는 더 신기하기도 하고.




나는 사실 글자보다 숫자를 좋아했다. 그렇지만...



솔직히 수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데 반해 감각은 형편없다. 그래도 지금 나는 먼 길을 참 잘 돌아온 것 같다.


내가 숫자에 관련해서 호기심이 참 많았던 사람이었다는 걸 방증하는 몇 가지 기억 조각(이라 쓰고 증거라고 해석하고 싶다.)들이 있는데, 이 자리에서 이야기보따리를 좀 풀어보고자 한다.




1. 초등학교 저학년 때, 조간신문 스포츠면의 프로야구 기사를 제일 좋아했다.

(이 무렵이면 국민학교 세대 아니냐고 따져 묻지 말자. 지금은 초등학교라고 부르니 초등학교로 쓴 것이라고 이해해두자.)


바로 94~95년이다. 프로야구의 1차 중흥기이자 '신바람 야구'로 유명했던(이걸로 20년을 우려먹냐;;) (2025년 추가 : 결국..! 결국 해냈다..!!) LG 트윈스의 마지막 우승 연도이기도 한 그 시절이다. 서울 전역에 '엘린이 광풍'이 불어닥친 시절이었지. 학교에 LG 트윈스 굿즈를 하고 가는 게 유행인 수준이었고, 반면 레전드 박철순 형님을 응원하며 OB 베어스 굿즈를 하고 가면 왕따당할 기세였던 시절이다. 다만 2010년 전후로 두산 베어스 20대 여성 팬들이 급증하는 걸 보며 진심으로 상전벽해를 실감...


라떼는 각설하고, 그만큼 나의 스포츠, 특히 야구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던 시절이고(지금은 축구 올인) 매일 LG 트윈스 선수들을 위시한 프로야구 선수들의 각종 기록을 눈이 뚫어져라 쳐다보고 연구하고 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냥 단순히 눈으로 보고 즐기는 수준이 아니라, '타율이 대략 어느 정도 이상이면 잘 치는 것이고', '1~9번 타자의 타율은 각각 대략 어느 정도 되며', '클린업 트리오라고 할 수 있는 3-5번 중심타선은 특별히 잘 치는구나'라는 인사이트도 도출했었고, '근데 LG 트윈스 4번 타자는 왜 이렇게 약해?' 와 같이 집단 간 분석에 따른 의문점 도출에도 눈이 트였었다. 더해서, 각 팀 주요 선수들의 공/수 지표와 '홈런 10걸', '도루 10걸' 과 같은 랭킹 지표들의 추이는 거의 외우다시피 할 정도였었다. 정말이지 '야구 덕후' 였다. 이때가 초등학교 2, 3학년 때니까..


나는 이 짓을 무려 중학생 때까지 했던 것 같다.(2000년 전후로 주 관심종목을 축구로 갈아타긴 했지만) 이 습관 때문에 숫자를 면밀히 보는 자세가 함양됐음은 좋았는데, 동시에 나는 스포츠 자체를 너무나 사랑하니 스포츠를 직업으로 삼아야겠다는 막연한 꿈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었다. 그래도 지금 돌이켜보면 숫자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가설을 세워서 머릿속으로 나름의 분석을 통한 인사이트를 도출하기도 했으니 당시의 내가 참 기특했던 부분.


"아, 심재학 선수는 4번 타자인데 왜 한 시즌에 30홈런도 못 치는 거야;;"

"유지현 선수 진짜 빠르네"




2. 반 애들 다 끌어모아 야구하고, 매일매일 타자 기록을 정리해두었다.


나의 야구사랑, 아니 숫자 사랑은 현실 세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때는 학교 친구들과 틈만 나면 동네 아파트 단지 잔디밭에 가서 축구나 야구하는 게 거의 일상이었는데, 기록 스포츠인 야구를 또 그냥 즐기기만 한 내가 아니었던 것이다. 오랜 시간 조간신문 정독으로 쌓은 내공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기록 야구'를 표방하기 시작한 것인데, 다른 반과의 경기 승리를 위해 모든 자체 연습경기에서 모든 친구들의 타율, 안타 수, 홈런 수, 도루 수 등의 주요 지표들을 다 기록해놓고 타순을 정하는,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을 선보였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하다. 미쳤던 것 같다.ㅋㅋㅋ


내 기준은 명확했다. 도루 잘 하면 1번, 번트 잘 하면 2번, 타율 높으면 3-5번, 여기서 장타율 높으면 4번.

타율 낮은 친구들 중에서 내림차순 정렬해서 6번~9번 세팅.


웃긴 건, 지금도 베프인 내 친구는 타율이 무려 8할이었고 나는 약 7할이었다. 보통 야구는 3할 이상이면 정말 잘 치는 거다. 10번 타석에 들어서면 3번 정도 안타 이상을 친다는 건데, 아무리 동네야구여도 8할, 7할은 선 넘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이 친구와 내가 둘이서 '기록 조작'을 위해 둘이 투타를 몇 번 했다.. 이게 97년이니까 24년 만에 고백한다. 내가 아리랑으로 공 던지고 이 녀석이 친다. 어차피 야수가 없으니 무조건 안타 아니면 홈런이다. 이렇게 타율을 끌어올리고 나는 3번 타자, 이 녀석은 4번 타자... 미안하다 친구들아.


도덕적 해이가 만연하고 부패했던 어린 시절이었지만, 어차피 실전에서 물방망이는 탄로가 나게 되어있는 법이므로 그런대로 정의가 승리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귀여운 추억이다. 우습긴 하지만 이제는 데이터 분석가의 도덕성과 통계적 오류에 대한 개념도 배웠으니 업무적으로 이렇게 하지 않으면 되지!!!!!!!!!!!!!!!!!!




3. 우리 집과 옆집의 전력량계를 거의 매시간 들여다보며 비교하고 인사이트와 액션플랜을 도출했었다.


이 자리를 빌려 약 25년 전 옆집에 죄송하다는 말을 전한다. 아파트 복도에 설치된 전력량계를 아시는가? 이게 참 재밌다. 요즘은 디지털화되긴 했는데, 오래된 아파트 가보면 예전 자동차 미터기처럼 숫자가 올라가고 아래는 은빛 디스켓처럼 생긴 원이 돌면서 현재 전력 사용량을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이 동심원이 빠르게 돌면 많이 쓴다는 이야기다. 에어컨 틀고 세탁기 돌리고 하면 정말 팽팽 돌아간다.


어릴 적 나는 이게 너무 재밌는 거다. '전력량계를 빠르게 돌아가게 하는 변수들이 무엇일까?'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고(물론 '변수'라는 워딩을 쓰면서 고민한 건 아니고) 에어컨, 선풍기, 전등, 냉장고 등 주요 변수(범인) 들에 대한 가설을 세워 우리 집의 변수들을 다 OFF 시켜보고 전력량계 돌아가는 걸 확인하고, 반대로 옆집에 놀러 가서 전등이랑 선풍기 등을 다 켜보고 전력량계를 확인해보고 하는 미친 짓(A/B 테스트)을 했었다. (죄송합니다. ㅠㅠ)


이 취미를 꽤 오래가졌는데, 전기세가 많이 나오게 하는 변인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터득할 수 있었다. 이 괴상한 취미를 왜 가지게 됐는지는 지금도 의문이긴 한데, 결국 이걸로 방학숙제도 갈음해서 마포구청 가서 발표도 했었던 기억이 나네... 전기 쪽의 꿈나무 소리도 듣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고 보니 나도 퍽이나 정상은 아니었던 것 같다.




수에 대한 호기심이 지대했던 것에 비하면 나는 과목으로써의 수학은 정말 못했다. 학창 시절 내내 나를 괴롭히는 부분이었고, 사교육을 거의 받아보지 않은 나였지만 고 2때 약 1년간 처음으로 과외라는 것도 해보았다.


하지만 내가 수학을 잘했다면 공대에 가서 아마 컴퓨터 프로그래머(요즘 말로는 개발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건 다행이다. 요즘 개발자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지만, 개인적으로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해서.. (우선 내가 소질이 없고 여러모로 개발자의 성향을 가진 분들에 비해 많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더욱 수에 능통하진 못해도 숫자를 좋아하는 내가 어릴 적 순수한 호기심에 대한 감각이 되살아나 결국 다시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


출처 : Unsplash의 adrian-swancar



나는 퇴사일기도 쓰고 하면서 턱없이 부족하지만 자아성찰을 위해서 부단히 애를 쓰기는 한다. 그래도 숨이 다 하는 그 순간까지도 정답을, 진리를 발견하지는 못하겠지. 그래도 찾아다니는, 희구하는 삶을 산다면 결국엔 행복할 것 같다. 그래서 오늘도 아주 미력하게나마 나 자신에게 묻고, 대답하고, 주저하고, 방황하기를 반복하는 게 아닐까. 그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도 모르겠으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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