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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을 주는 모기나라 Aug 08. 2016

경북의 여성독립운동가들

김우락 허은 남자현 김락 이해동

  오랜만에 혼자 같은 곳을 향해 가는 사람들을 만나러 갑니다. 차가 생기면서 으레 먼 곳은 직접 운전을 해서 갔는데 이번에는 느릿느릿 버스를 타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처음으로 버스 예매를 해보았습니다. 그동안은 예매하지 않아도 되는 곳을 갔었고 예매가 필요하면 내가 예매를 하지 않아도 누군가 대중교통을 예매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안동가는 버스는 처음 타보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지 모르고 또한 차편도 자주없어 자칫 버스표가 없으면 시간내에 갈수없기 때문에 예매를 했습니다. 버스표가 없을까봐 예매를 하는 나의 낯선 모습은 꼭 가야한다는 의무감과 반가운 사람을 만난다는 설레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습니다.


  평소와 달리 조금 일찍  일어나 집안 일을 해놓고 짐을 꾸려서 터미널로 갔습니다. 예상과는 달리 안동가는 사람들은 별로없었습니다. 오랜만에 버스에서 상주와 예천, 안동으로 가는 풍경을 즐기면서 가고자 했으나 여지없이 잠을 자버렸습니다. 버스만 타면 자는 '병'을 이번 답사에도 내내 고치지를 못하고 틈만 나면 잠을 잤습니다. 안동에 내려 숙소까지 버스를 타야하는 수고스러움은 누군가에 의해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택시를 타는 편안함으로 바뀌었습니다.


낯선 사람들임에도 낯설지 않은 대면은 이 모임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간단히 점심을 터미널에 있는 식당에서 해결했습니다. 그런데 아차! 메뉴를 잘못 골랐네요. 나중에 보니 저녁 식사도 비빔밥이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택시 두대에 나누어 타고 구비구비 길을 따라, 가끔은 안동호를 끼고 도는 풍경을 구경하면서 숙소로 왔습니다. 내려야 할 곳을 잘못 정해 뙤약볕에 우리는 엘리베이터와 계단을 오르내리며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우리가 설마 1등인가 하는 생각은 역시나 착각이였습니다. 짐을 채 풀어놓기도 전에 박물관가자는 꼬드김에 다시 찌는 더위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국학진흥원 유교박물관은  내가 흥미를 가지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대학원 석사 주제와 맞닿는 고문서들이 즐비하게 있는 곳입니다. 능력의 부족을 절실히 느끼고 공부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고  포기해버린 주제들이 널려있었습니다. 담담하게 박물관을 둘러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강연에서 첫번째는 졸았지만 두번째 발표하신 선생님의 설명은 흥미진진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한 인물에 대해 연구하는 과정이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또 하나의 깨달음은 바로 안동지역의 혼맥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안동 지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어느 지역이건 조선시대 양반가나 지역사를 연구함에 있어 혼맥관계를 정리하는 것은 가장 우선시 되는 작업이기는 합니다.


  밤이면 찾아오는 술자리는 오랜만에 만나도 어제 만난 사람처럼 술을 마시고 술자리를 뜰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짝퉁 안동소주(?)라도 함께 마시니 즐겁지 아니한가? 어느 누구도 맞다 틀리다의 이분법적인 생각보다는 누구나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공감해주는 대화는 새벽이 되어도 아침이 밝아와도 끝이 날 줄 몰랐죠.


  아침이 밝았습니다. 아침부터 태양은 안동을 쪄 죽일듯했습니다. 밤새 떠들었던 흔적은 사람들의 얼굴에만  남아있을 뿐 그 자리는 말끔히 치워져 있었습니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차에 실려가듯 한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이런 날씨는 틈만나면 그늘을 찾게 만들었다

  이제 답사가 시작됩니다. '여성독립운동가들'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첫장소는 임청각입니다. 임청각하면 석주 이상룡을 빼놓을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여성을 만나러 왔습니다. 임청각 가기전에 먼저 만나는 것은 법흥사지 7층 전탑은 다시 보아도 크고 멋있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설명은 이곳은 절터였는데 조선시대가 되면서 유교에 밀려 절은 양반의 살림집으로 내놓아야 했던 사실, 그건 내가 놓치고 있었습니다. 소수서원은 그렇게 원래 이곳은 절이 있었던 곳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이곳은 그렇게 이해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임청각은 일제에 의해 철길이 놓이면서 반토막나는 아픔을, 현재는 후손들간의 종택을 두고 재산권 다툼으로 아픔을 겪고 있는 곳입니다. 지금은 허은여사 5번째 아들이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예전 다큐에서 임청각 재산소유에 대해 방송을 본적이 있었습니다. 후손들이 아래로 내려가면서 가지를 친 상태라 그들을 찾아 일일이 소유권 양도 또는 포기 싸인을 받아야 한다고 했는데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 방송에 나왔던 분이었는데 그때보다 많이 연로하신 모습이었습니다.

허은 여사의 5번째 아드님

석주 이상룡의 부인 김우락(백하 김대락의 여동생)은 남편 뜻에 의해 안락한 삶을 뒤로 하고 57세 만주로 가서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했습니다. 그의 며느리 이종숙은 건강이 좋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손자 이병화의 부인으로 허은이 만주에서 시집을 옵니다. 허은은 왕산 허위집안, 이육사 어머니 허길집안 사람입니다. 만주에서 삶과 이상룡의 죽음이후 유언에 따라 귀국한 이후 국내에서의 삶은 한편의 대하드라마였습니다. 수많은 자료와 흔적들이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습니다. 그러한 관계들과 이야기를 쉬지 않고 이야기해주는 선생님든 더 대단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 '혁명의 어머니', '전율할 노파', '근대 한국의 여걸'이라 불리는 남자현을  만나러 갑니다. 영화 암살의 주인공의 모델이라고 하는 분입니다.

남자현 사진

 안동에서 고개너머 영양으로 갑니다. 경치좋다는 선생님의 말을 듣고 한번 즐겨볼까 했으나 여지없이 눈을 뜨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을 연구할 사료가 부족한데(사실 사료의 부족도 있지만 그동안 우리가 1차 사료를 수집하는데 소홀한 면도 인정해야죠. 누군가가 사료를 찾아오면 활용할 줄만 아는 연구자들 반성 좀 합시다) 특히 여성독립운동가들은 그 정도가 아주 심할 뿐만 아니라 남자들이 독립운동하는데 뒷바라지한 사실까지 우리가 미처 관심을 가지지 못했으니 독립운동사에서 여성은 소외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남자현은 그래도 많은 흔적들이 남아있는 분입니다. 남편이 의병활동으로 죽자 남편의 피묻은 옷을 몸에 두르고 다녔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남편죽고 시부모님 다 봉양하고 자식들 다 키운 후 만주로 독립운동을 하러간 분입니다. 이 분도 안중근처럼 단지를 했던  분입니다. 유관순보다 더 높은 훈장을 받았다고 합니다.

추모각

영양에서 점심먹었습니다. 간고등어구이와 비빔밥 중에 먹고 싶은 것을 먹는 것이었지만 나중에 보니 특별한 차이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환경오염의 주범 이 생선은 너더너덜 할때까지 뜯어먹었습니다. 이후 간식으로 먹은 아이스크림은  대박^^


  이제 안동 내앞마을로 갑니다. 의성김씨 집성촌이 아직도 유지되는 전통마을입니다. 이곳에서 일단 백하 김대락의 생가 백하구려를 갔습니다.

 김락(임청각 김우락의 여동생)을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김대락은 삼천석 댁으로도 유명한 집안입니다. 락 할매(후손분이 설명할 때 이렇게 하셨습니다)는 향산 이만도 선생의 집으로 시집가서 아들까지 낳고 살다가 향산선생이 나라를 빼앗기자 단식으로 순국하면서 온 집안이 독립운동하면서 삶이 변화됩니다. 남편과 아들 모두 독립운동을 했고 본인도 삼일운동에 참가했다가 잡혀 고문으로 실명하게 된 분입니다.

후손되시는 분이 무더위에 서 있으니 대청마루에 앉기를 권했습니다. 옛 양반들은 손님이 오셔서 편안하게 있기를 바라는데 우리가 서 있으니 마음이 불편하셨것 같습니다. 우리가 시원하게 먹은 수많은 수박껍질 조차도 본인이 치우겠다고 그냥 두고 가라고 하신 분입니다. 겸손, 배려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또  한명의 인물 이해동 여사를 만나러 갑니다. 이해동은 일송 김동삼 선생의 며느리입니다. 현재 김동삼 선생의 집은 표지석으로만 남았고 그 집터도 다른 사람 소유가 된 상황이었습니다. 후손이 잘되어야 조상을 현창하는 일도 잘된다는 말 결코 과장된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은 완전히 다른 분이 살고 있다고 함

  우리는 김동삼 선생의 생가터를 둘러보고 청계고택 제청에 앉아 설명을 들었습니다. 청계는 5아들을 두었는데 3명이 문과 급제, 2명이 소과에 입격한 것으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그 중 한명이 퇴계의 제자인 학봉 김성일입니다. 임진왜란 때 활약한 분으로 유명하죠.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습니다. 후손으로부터 내앞마을의 내력을 듣고 이해동 여사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김동삼 선생이 하얼빈에서 체포되었을 때 그의 부인 박순부 여사가 면회를 가지 않고 며느리를 보낸 이야기와 그곳에서 그의 어린 막내 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이야기에 가슴이 먹먹해 왔습니다. 이해동 여사는 해방된 공간에도 돌아오지 못하다가 1989년에 영구 귀국하고 2003년 98세에 별세하셨다고 합니다.

청계고택 - 학봉 김성일의 아버지가 지은 집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의 아내들은 내 가족을 지키고  예전의 삶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 그래서 살아내야 한다는  의지 그것이 바로 독립이 아닐까 한다는 누군가의 말이 많이 많이 와 닿았습니다.


내앞마을을 끝으로 이번 답사를 끝냈습니다. 내일까지 함께 못한 아쉬움과 가네코 후미코를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오늘의 일정은 이렇게 정리가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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