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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을 주는 모기나라 Jun 04. 2016

보은 답사 - 속리산의 암자들

속리산에 내려 앉은 마음의 쉼터


  수정암
 속리산에는 법주사 이외에도 많은 암자와 20여 곳의 이름 없는 절터가 확인되고 있다. 현재에도 복천암, 수정암, 상환암, 중사자암, 여적암, 탑골암 등은 스님들의 수양처로서 또는 일반인들의 기도처로서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이 암자들을 보러 속리산을 다시 찾았다.
  가게들은 굳게 닫혀 있어 아직 손님들을 맞이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지만, 속리산의 아침은 일찍 시작되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등산을 하는 사람들, 법주사에 기도하러 가는 사람들, 산책을 나온 스님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입장료를 받기 위해 어둠이 채 가시기 전에 유일하게 산속에서 빛을 내고 있는 매표소의 사람들. 그들은 각자의 목적을 위해 남들보다 아침을 일찍 맞이하고 있었다. 시간이 좀 더 흐르면 속리산은 등산하는 사람들로 인해 복잡하고 시끄러워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나만의 시간 속에서 나만의 속리산을 느끼기에 더 없이 좋은 시간이다.
  법주사로 가는 길에 처음 만나는 암자는 수정암으로 비구니들의 수행 공간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553년(백제 성왕 31) 의신조사가 법주사와 함께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수정앞 징검다리

  수정암을 찾아가는 길은 법주사 경내를 통해서 가는 방법과 법주사에 도착하기 전 개울에 있는 징검다리를 건너서 가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수정암 앞 개울가에는 징검다리를 건너기 위해 왔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소원을 빌기 위해 쌓아 놓은 돌탑들이 여기저기에 놓여 있었다. 이 돌탑들은 많은 비가 와서 개울의 물이 넘치기 전까지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소소하게 보는 재미를 느끼게 해줄 것이다. 그리고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소원을 담은 탑 쌓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징검다리를 건너면 가을을 느끼게 하는 코스모스가 한가득 피어있어 사람들을 카메라 앞에 서게 만들었다. 그 오른쪽으로 승탑들이 독립된 공간에 서 있고, 왼쪽으로 가면 수정암으로 가는 문이 있다.

입구

 수정암은 찾는 이가 많지 않아서 그런지 조용한 분위기였다. 스님들은 찾아볼 수 없었고 다만 극락전에서 딸에게 절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어머니의 모습만이 보였다. 딸에게 중요한 일이 있어 이곳에 기도를 하러 온 듯 보였는데 불전에 기도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딸에게 세심하게 가르쳐주는 어머니의 모습엔 정성이 가득 담겨 있었다.
  수정암에는 법주사에서 수정암으로 옮긴 목조아미타불좌상이 있는데 조선시대 후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또한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불상이 흩어져 있었다 하는데 현재는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이관되어 있다.

목조아미타불좌상

  탈골암

  수정암을 나와 두 번째로 찾은 곳은 탈골암이었다. 탈골암은 720년(신라 성덕왕 19)에 만들어졌고 776년(신라 혜공왕 12) 진표율사가 고쳐지었다고 한다. 암자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하나는 진표스님이 이곳에서 제자들을 깨우쳐 해탈하게 했다하여 탈골암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신라 탈해왕 때 경주 김씨 시조인 알지가 닭의 머리를 한 자신의 용모를 한탄하던 중 속리산의 한 암자에 좋은 약수가 있다는 말을 듣고 달려와 물을 마시고 사람의 머리로 바뀌었다고 그 암자를 탈골암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법주사를 지나 문장대 쪽으로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보면 왼쪽으로 탈골암으로 올라가는 표지판이 보였다. 이곳부터는 오르막길이 시작되어 땀을 제법 흘려야 하지만 시멘트 포장길이 잘되어 있어 암자까지 차를 타고 손쉽게 갈 수도 있다. 탈골암 가는 길은 속리산의 주요 등산로가 아니라서 사람들로 북적거리지 않아 속리산이 주는 숲의 느낌을 느끼기에는 좋은 곳이다.

석탑 아랫부분

  탈골암은 ‘암자’ 하면 예상되는 소박한 느낌보다는 웅장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약사전의 반짝이는 기와와 화려한 단청은 햇빛 아래 눈이 부셨다. 이번 탈골암 답사의 일차적인 목적은 약사전 앞에 있는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석탑을 만나는 것이었다. 원래는 탈골암에서 동남쪽으로 200m 떨어진 작은 탈골암지에 있었던 것인데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그런데 주변을 한 바퀴 다 돌아도 탑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기도하러 오신 분에게 물어보니 너무도 현대적 이미지가 강한 탑을 가리키셨다. 탑을 다른 곳으로 옮겼을 가능성을 생각하고 약사전 뒤쪽의 산길로 오르려고 하는데 비구니 스님이 그쪽에는 길이 없으니 내려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스님께 탑의 행방을 물어보니 탑은 수리를 해야해서 다른 곳에 보냈다고 하였다. 지금은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는 지대석(건축물을 세우기 위하여 잡은 터에 쌓은 돌)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복천암
  탈골암을 내려와 복천암을 찾았다. 세심정 휴게소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복천암이 있다. 복천암은 720년(신라 성덕왕 19)에 창건된 천년 고찰로 속리산을 대표하는 암자로 규모도 가장 크다. 사찰의 이름을 복천암이라고 한 까닭은 사찰 한쪽에 바위 사이로 물이 흘러 모이는데, 그 물이 항상 마르지 않고 풍성하기 때문이다. 이에 고려 공민왕이 머물며 극락전에 '무량수'라는 편액을 친필로 써서 하사하였고, 조선 세조가 병을 치유하러 왔었다는 유명한 일화도 전해지는 곳이다.
  복천암 극락보전은 1735년부터 1737년까지 다시 만들어진 것으로 이곳에 모셔져 있는 목조삼존불상 역시 당시에 함께 조성된 것이다.


극락보전목조삼존불상

  복천암 뒤편 산등성이에는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승탑이 있다. 그런데 복천암 어디에도 승탑을 알려주는 안내판이 없었다. 복천암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앞쪽으로 깨끗하게 정리된 길이 보여 혹시 하는 마음으로 올라가 보았다. 바위의 경사를 이용하여 만든 계단을 지나 얼마가지 않아 승탑이 보였다.

승탑가는 길


  산속에 평평하게 터를 닦고 승탑을 만든 것에서 정성이 깃들어져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이곳을 매일 관리하는지 승탑 주변에는 낙엽 하나 떨어져 있지 않아 신발을 벗고 올라가야 할 것 같았다.

수암화상탑과 학조화상탑

   이곳에는 수암화상탑과 학조화상탑이 나란히 서 있는데, 모양이 비슷해서 일란성 쌍둥이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이란성 쌍둥이이다. 이것은 신미와 학조 두 스님의 승탑이다. 신미대사는 세종이 한글을 만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학조는 신미의 제자이다. 그러니까 스승과 제자의 승탑이 나란히 있는 것이다. 보물 제1416호로 지정되어 있는 복천암 수암화상탑은 신미대사의 승탑으로 1480년(성종 11)에 조성되었다. 학조화상탑은 보물 제1418호로 1514년(중종 9)에 조성되었다. 두 승탑은 조선 초기의 승탑 양식을 알려주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금강골 쌍탑

  복천암에서 다시 세심정 휴게소로 내려와 금강골 쌍탑을 찾아 나섰다. 금강골 휴게소 맞은편 계곡 건너 능선을 타고 250m 가면 있다고 안내되어 있지만 막상 가보면 막막하기 그지없다. 금강골 쌍탑으로 가는 표지판조차 없다.
  금강골 휴게소 앞 계곡에 서면 가파른 산비탈이 나온다. 과연 이곳을 올라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부터 든다. 계곡을 내려와 희미하게 난 길을 올라가 능선 위에 섰으나 어디로 가야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무작정 오른쪽 능선을 따라 걸었다. 인터넷에서 이곳을 먼저 찾은 사람이 산에서 자라는 조릿대를 만나야 한다는 것과 등산객이 매달아 놓은 하얀색 표식을 따라 가다가 겨우 찾았다는 글을 봐서 무작정 조릿대를 찾아 나섰다. 왼쪽으로는 거대한 바위들과 울창한 나무들, 오른쪽으로는 계곡의 절벽으로 인해 위험했고 예전에 이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등산로는 수풀로 덮이고 희미해져 어디를 가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헤매다가 겨우 조릿대밭을 찾았는데 사람 키보다 더 커서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우연히 등산객의 표식을 찾아 약간의 희망을 가지고 걸었으나 다시 길을 잃어 헤매고 말았다. 그렇게 헤매기를 수차례 한 결과 예전에 산을 찾던 사람들이 올랐을 등산로가 보였고 그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금강골 쌍탑이 보였다. 심마니가 산삼을 찾은 듯 매우 기뻤다.
 

쌍탑

   나란히 서 있는 쌍탑 앞으로는 각각 두 그루의 소나무가 탑을 경호하는 듯 서 있었다. 탑은 중부지방에서 보기 드문 고려시대의 쌍탑으로 신라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추정된다. 1992년 도굴되어 무너진 것을 1997년 한국교원대학교 박물관에서 복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쌍탑 앞에는 고리타분하고 어려운 용어로 가득한 안내판조차 없어 탑 전문가가 아닌 이상 미리 공부를 하고 오지 않으면 어떤 탑인지 전혀 알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200호로 지정이 되었으면 최소한 이곳을 찾는 길잡이와 탑에 대한 간략한 안내판 정도는 만들어야 되지 않을까 한다. 비록 이번엔 헤매다가 겨우 찾았지만 다음에도 다시 찾아 올 수 있다고 장담은 못하겠다. 법주사의 거대함에 눌려 이곳을 찾는 이가 드문 만큼 길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지만,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이곳을 찾을 사람들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는 해주었으면 한다. 다음에 이곳을 찾는 사람을 위해 어떠한 표식도 하지 못하고 내려온 것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이 이외에도 중관음암지의 석종형 부도, 조선 태조가 즉위하기 전에 백일기도를 드렸다는 상환암, 조선 선조가 즐겨 찾았다는 중사자암,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푸른 석탑이 있는 여적암 등 많은 문화재와 이야기가 있는 암자들이 속리산 곳곳에 하늘에서 별이 내려와 박힌 것처럼 빛나고 있다. 속리산과 법주사를 찾는 사람들이 주변 암자에도 이처럼 많은 문화재들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면서 산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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