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간히 내리던 비조차도 더 이상 무더운 여름을 감당할 수 없다는 듯 멈추어 버린 날, 처음 찾아간 곳은 중요민속자료 제139호로 지정되어 있는 최태하 가옥이었다. 최태하 가옥 앞의 너른 공터에는 무더운 여름을 벗 삼아 제멋대로 자라던 풀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 이곳을 찾는 손님들에 대한 양반가의 배려를 느끼게 했다.
최태하 가옥을 만난 첫 인상은 이전에 익숙하게 봤던 전통 가옥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고래등 같은 가와집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초가집과 기와집의 어색한 동거는 색다르게 다가왔다.
낯선 풍경이 주는 호기심에 이끌려 서둘러 집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내부 관람이 가능한 시간과 요일을 적어놓은 안내판이 보일 뿐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우리가 방문한 날은 관람이 가능한 요일이 아니었지만 안내판에 나온 곳으로 전화를 드리니 인상 좋은 할머니 한 분이 감사하게도 바로 와주셨다.
전통 가옥에 어울리지 않게 만든 현대식 대문이 집안으로 들어가는 첫 문이었다. 원래는 집 앞에 있는 공터 바깥으로 1970년대까지는 길을 따라 외부 담장이 둘러져 있고 솟을대문이 있어 주 출입구 이용되었다고 한다.
대문을 들어서니 바깥 대문채와 사랑채가 동남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당채 앞마당에는 크고 작은 나무들로 만들어진 정원이 있었다. 특히 수령이 200여년 남짓 된 회화나무는 거대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 한눈에 보아도 시원해 보였다. 습한 땅에 짙은 그늘을 만들어서인지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어둠이 드리운 나무 주변에는 신령스러운 공기가 흐르는 듯도 했다.
회화나무는 몸집이 크게 자라 우리나라에서 은행나무 다음으로 정자나무로 인기가 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학자수, 출세수, 행복수라고도 부르는데 이 나무를 심으면 집안에 학자가 나고 큰 인물이 나오며 집안이 행복해진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이에 우리 선조들은 이 나무를 매우 귀하고 신성하게 여겨 함부로 아무 곳에나 심지 못하게 하였다. 회화나무는 고결한 선비의 집이나 서원, 절, 대궐 같은 곳에만 심었다.
사랑채는 이 집에서 유일한 기와집으로 일(一)자형의 앞면은 4칸 반, 옆면은 앞뒤 퇴가 있는 3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1983년 보수 공사 시 상량함에서 ‘숭정기원후 임술’이라는 기록지가 나와 1682년(숙종 8)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나 공인되지는 않았고 대체로 안채에서 발견된 상량문에 따라 1892년(고종 29)에 지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바깥 대문채를 지나면 작은 마당이 보이는데 마당에서는 다시 안채로 들어갈 수 있는 두 갈래 길이 보였다. 하나는 사랑채와 직각을 이루는 중문채를 통해 안채로 들어갈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사랑채 뒤편으로 작은 문을 통해 안채로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마당 한쪽에는 작은 화단이 꾸며져 있어 집안의 분위기를 화사하게 만들어 주었다. 중문채는 일(一)자형으로 앞면 5칸, 옆면 1칸으로 가운데 대문을 두고 대문 좌우에는 방과 부엌, 광을 두었다.
중문채를 지나면 사랑채와 직각으로 안채가 동북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안마당을 들어서면 잔디밭이 인상적인데 이 집을 지을 당시부터 있었는지 아니면 현대에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초가의 회색빛과 잔디밭의 푸른빛이 대비를 이루어 선명한 인상을 주었다. 안마당에는 헛간채와 광채, 방앗간채가 좌우에 배치되어 있고, 안채 뒤쪽으로 장독대와 뒤주가 있었다. 방앗간을 집안에 따로 둘 정도였으니 이 집안을 천석꾼 집안으로 불렀다는 이야기가 빈말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안채는 일(一)자형으로 앞면 6칸, 옆면 2칸으로 옆면 앞뒤로 반 칸씩 툇간이 있으며, 부엌, 안방, 대청, 건넌방이 이어져 있다. 윗부분에는 다락을 설치해서 안방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했으며, 뒤쪽으로도 여닫이문을 달아 장독대가 있는 곳으로 나갈 수 있게 했다. 안방 앞에는 툇마루가 고, 뒤의 퇴에는 공방을 두고 있다. 대청에는 앞뒤로 툇간을 두었는데 뒤쪽의 퇴는 벽으로 막아 조상의 위패를 모셨다.
안채 왼쪽으로는 담을 두르고 작은 문을 만든 넓은 공터가 있다. 할머니께 이유를 물어보니 원래는 별당이 있어 시집 온 새색시가 생활하던 공간이었는데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날 때 동학농민군이 불태웠다고 한다. 평소에 주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에 동학농민군이 이 집에서 가장 쓸모가 없다고 여긴 별당만 불태우고 갔다고 한다. 그 이후 새로 건물을 올리지 않고 그냥 두어 지금은 토마토며 고추 등이 발갛게 익어가는 텃밭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이 집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사랑채를 제외한 모두가 초가라는 것이다. 전남 구례지역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조선시대 이 지역 양반집의 74%가 초가집이었다는 흥미로운 연구결과가 있다. 이것을 모든 지역에 적용하기 어렵지만 우리가 생각하기에 모든 양반집이 기와집이었을 것이라는 선입견에 대해 한번쯤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이와 함께 이곳의 집이 초가인 이유를 풍수지리설과 관련시키기도 한다. 즉 이 지역은 학이 알을 품는 지형이라 하여 무거운 것을 올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집안의 조상묘는 비석도 없으며 안채만 기와를 올릴 정도로 튼튼한 기둥을 만들고, 나머지는 초가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던 것을 새마을 운동 당시 초가 대신 기와를 올렸는데 이때에도 기둥에는 아무런 문제없이 지탱하였다 한다. 그러나 옛 모습이 초가인 것이 발견되어 다시 초가집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우리가 이 집을 답사하는 동안 할머니께서는 지루하실텐데 얼굴 한번 찡그리시지도 않고 한쪽 그늘진 곳에 앉아서 조용히 기다려 주셨다. 이 집의 형태보다는 실제 이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할머니께 이것저것 물어보니 차근차근 알고 계시는 내용을 친절하게 이야기해 주셨다. 안채는 기와를 올렸을 때가 멋지고 좋았는데, 군청에서 초가집으로 바꾸어서 집이 안 좋아졌다고 아쉬워 하셨다. 역사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할머니의 말씀에 공감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문화재를 복원할 때는 원래 모습과 최대한 비슷하게 복원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옛집은 사람이 살지 않으면 금방 무너져 버린다. 사람이 쓸고 닦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살아야 오랫동안 유지된다고 한다.
“할머니, 이렇게 큰 집을 관리하기 힘드시겠지만 앞으로도 건강하셔서 오랫동안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