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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을 주는 모기나라 May 15. 2016

보은 산성 답사-삶과 죽음의 엇갈린 운명이 만나는 성

삼년산성, 호점산성, 매곡산성

삼국통일의 교두보 삼년산성
  삼년산성은 470년(신라 자비왕 13)에 성을 쌓은 기록과 486년(신라 소지왕 8)에 고쳐 쌓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성을 만든 연도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또한 삼년산성이라는 이름은 공사를 시작한지 3년 만에 완공된 것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성의 이름에 대한 유래까지 기록된 유일한 우리 고대의 대표적인 산성이다. 더불어 오랫동안 이 지역을 지키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낸 곳이기도 하다.


삼년산성 성벽

  사적 제235호로 지정 보호되어 있는 삼년산성은 해발 350m 정도의 오정산 정상과 능선을 따라 돌로 쌓여 있다. 평지에서 바라보면 나지막한 산등성이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이 보인다. 그리고 성위에 올라가 보면 한 눈에 사방이 내려다보이는데, 그것은 성벽을 높이 쌓은 결과이다. 자그마치 20m에 달하는 성의 높이는 우리나라의 어디를 가도 볼 수 없는 삼년산성만이 가지는 위용이다. 성벽은 지세를 이용하여 쌓아 나갔으며, 서쪽의 낮은 부분에 가장 통행이 많은 성문을 마련하였는데 여기로는 수레가 다닌 자욱이 남아 있다. 동쪽 계곡에도 큰 성문을 만들었고, 남쪽과 북쪽의 잘록한 부분에도 성문을 내었는데 여기에는 보다 규모가 작은 문을 만들었다.

서문터

  성벽은 산줄기의 바깥 경사면이 시작되는 높은 위치를 따라 축조되어 성안은 오목한 솥의 안쪽처럼 아늑하다. 곳곳의 성벽이 휘어지는 부분에는 밖으로 둥글게 돌출되는 곡성이 자리하고 있어 성벽의 위용을 더욱 인상적으로 보이게 한다.
 

  한 번도 점령되지 않은 삼년산성을 지금은 잘 닦여진 길을 따라 걸어올라 갈 수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삼년산성에서 가장 낮은 서문으로 올라가는 길은 10분이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짧았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라 했듯이 삼년산성을 오르는 길에도 가을의 정취를 느낄 만한 풍경이 곳곳에 펼쳐졌다. 먹음직스럽게 익어가는 빨간 사과, 통통하게 살이 오른 보은 대추, 그리고 형형색색으로 피어있는 코스모스가 가을이 왔음을 앞다투어 뽐내고 있었다.
  삼년산성은 멀리서도 그 늠름한 모습을 느낄 수 있지만 산성에 가까워갈수록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성벽의 높이에 더욱 입을 다물 수가 없어진다. 원래 이 지역에 산성을 쌓을 때는 납작하고 평평하게 생긴 점판암을 흔히 사용했으나, 성벽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군데군데 화강암을 사용한 것이 보이기도 한다.
  

  삼년산성은 성벽 아래로 성을 한 바퀴 둘러볼 수 있게끔 길이 잘 닦여져 있다. 여름동안 무성히 자란 풀들을 깔끔하게 잘라놓아서 수풀을 헤치고 다니는 수고도 덜 수 있었다.
  남문지 방향으로 성을 둘러보기로 하고 답사를 시작하였다. 높이 올라갈수록 보은 읍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남문을 지나 산성을 한 바퀴 돌면서 사방으로 탁 트인 시야와 넓게 펼쳐진 평야를 보면서 이곳에 산성이 만들어진 이유를 충분히 납득하게 되었다. 그런데 성벽 앞에 올라가면 위험하다는 안내판이 보였다. 그것을 보자 옛날 사람들은 적과 싸우기 위해 올라가면 죽을 것을 알면서도, 혹은 올라가기 싫어도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올라가야 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위험하니 올라가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그런데 서문을 중심으로 좌우로만 성벽이 잘 보존되어 있고 나머지 구간들은 성벽의 속살이 드러날 정도로 무너진 곳이 있고, 성벽이 허물어져 낮아진 부분도 꽤 있어 아쉬웠다.
  



  소금재 아래 가마성, 호점 산성

  보은은 삼국시대 백제의 입장에서는 신라를 압박하는 곳이며, 신라의 입장에서는 소백산맥을 넘어 한강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로서 두 나라가 날카롭게 대립하던 곳이었다. 그러다보니 보은에는 자연스럽게 산성들이 많이 남아있는데 무려 14개의 성이 확인되고 있다. 그 중에서 일반 사람들에게 보은을 대표하는 산성을 묻는다면 십중팔구는 삼년산성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규모면에서 보면 호점산성이 단연 으뜸이다.
   ‘호점(虎岾)’이라는 이름은 풍수지리와 관련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호점산성은 가마성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성안 계곡에 있으면 가마솥 안에 들어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호점산성은 회남면과 회인면 경계에 있는 호점산을 중심으로 해발고도 280m 이상의 산봉우리 다섯 개와 그 사이의 계곡을 돌로 둘러싼 산성으로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호점산성 등산로

  호점산성은 언제 누가 쌓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려시대에 피난용으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성안에서 발견되는 그릇조각과 기와의 대부분이 고려시대의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이 자리 잡고 있는 위치와 성을 쌓는 방식에서도 고려시대의 특징이 보인다. 첫째, 호점산성은 농경지가 많지 않은 골짜기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 고대사회가 허물어지면서 호족(신라 말 고려 초의 지배층)이 등장하는 이후에 삼국시대보다 규모가 크고 험준한 요새를 골라 성을 쌓는 일반적 현상과 일치하고 있다. 둘째, 돌을 쌓아 성벽을 만들 때 일정한 간격으로 기둥을 세운 흔적은 대략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에 일시적으로 유행하였는데, 이러한 흔적이 잘 남아있는 곳이 바로 호점산성이다. 이와 유사한 산성은 충주의 대림산성, 단양의 독락산성, 문경의 노고성, 제천의 와룡산성, 춘천의 삼악산성 등이 있다.

성벽에 남아있는 홈


  호점산성을 가기 위해 회인면에서 대전방향으로 571번 지방도를 달리다가 주유소를 지나 바로 우회전하여 용곡교를 건너면 회인서당이 나온다. 회인서당에서 왼쪽으로 차 한 대 정도 지날 수 있는 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주차장이 나오는데, 여기서부터 호점산성 답사가 시작된다.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잘 정비된 나무 계단을 딛고 산에 올랐는데 인적이 드물어서인지 등산로는 무더운 여름햇살을 품은 나무와 풀들이 무성했다.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낮은 고갯길이 끝나는 지점에 다다르면 동문 표지판이 보이고 두 갈래 길이 나타난다. 이에 왼쪽으로 보이는 다리를 건너 치알봉 방면으로 길을 잡았다. 다리를 건너자 나무 계단으로 된 오르막길이 계속 이어졌다. 산속인데도 한여름이라는 계절의 힘이 큰지 시원한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더위에 지칠 대로 지친 데다 산성까지 찾으며 걷자니 몇 배로 힘이 들었다. 그렇게 20~30분쯤 걸으니 등산로 옆으로 돌무더기가 제법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인공적인 것인지 자연적인 것인지는 구분이 잘되지 않았다. 산성을 찾을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품고 조금 더 걸으니 확실하게 산성을 확인할 수 있는 성벽이 나타났다. 그리고 등산로 주변으로 기와들도 더러 눈에 띄기 시작했다.
  오르막길이 끝나니 완만한 능선이 나타났고 곧 치알봉이라는 표지석과 함께 쉼터가 보였다.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난 후 계속 산성을 찾기 위해 갈미봉 방향으로 길을 재촉했는데, 완만한 능선과 소나무 숲길이 이어져 걷기에 편안했다. 그리고 능선을 따라 산성의 흔적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어떤 곳은 성벽이 아니라 전통마을 돌담길을 걷는 착각이 들 정도로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도 하였다. 비록 청주의 상당산성처럼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있지는 않았지만 옛 모습이 많이 남아 있었다. 삼년산성은 화강암으로 다시 쌓으면서 옛 모습을 잃은 것이 적지 않았는데, 호점산성은 비록 허물어지고 있어 보는 사람을 안타깝게 했지만 사람의 손길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있다 보니 옛 모습이 많이 남아 있어 한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산 능선을 따라 군데군데 남아있는 성벽을 보면서 굳이 이곳에 성벽을 쌓을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적군들이 쉽게 오를 수 있는 지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급경사 지형에 돌을 날라 쌓아야 했던 사람들의 고통을 떠올라 예나 지금이나 전쟁이 사람의 삶을 너무 고단하게 만드는구나 싶었다.

나무사이로 보이는 성벽

  동문터를 시작으로 남문터와 서문터를 알리는 표지판을 보면서 ‘산성의 어디쯤이겠구나’ 상상하면서 걷다가 북문터를 마지막으로 하산하였다.



  삼년산성과 비슷한 나이를 먹은 성, 매곡산성
  청주에서 굽이굽이 피반령을 넘어 높은 산 사이에 살포시 내려앉은 듯 자리 잡은 회인에 들어서면 높은 건물이나 화려한 느낌보다는 오히려 1980년대에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든다. 단청이 바란 듯한 무채색의 건물과 손으로 그린 듯한 가게의 간판들이 남아 있어 드라마 세트장을 옮겨놓은 듯도 하다. 이렇게 개발이 한 발짝 비켜나갔기 때문에 회인은 작은 동네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문화재들이 남아 있다. 삼국시대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매곡산성도 그중의 하나다.
  매곡산성은 회인면 부수리 아미산(187m)에 있는 둘레 695m, 면적 29,537㎡의 석성이다. 매곡산성은 회인천가의 험한 절벽을 이용하여 쌓은 성으로 평면이 반달모양으로 대체로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모양이다. 자리 잡고 있는 위치로만 본다면 백제의 초기 왕궁터로 유력시되고 있는 풍납토성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미산과 회인천


  매곡산성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가파른 경사와 산 아래의 회인천이 천혜의 해자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나마 편하게 올라갈 수 있는 곳은 성의 북쪽이다. 그런데 이 길은 몇 년 전에 어떤 사람이 성내의 농경지를 경작하기 위해 중장비를 동원해 길을 내면서 성벽의 일부가 완전히 파괴된 현장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아직까지 복구되지 않은 채 농로로 이용되고 있었다.
  성안으로 들어서면 농작물이 심어져 있고 그 농작물을 관리하기 위한 가건물이 있다. 아마도 성안은 오래전에 개인 소유의 땅이 된 것 같았다. 한쪽엔 기지국도 보이고 무덤들이 떼를 지어 있을 뿐, 성안에서 아무리 둘러봐도 산성의 모습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성 밖을 바라보면 청원-상주 간 고속도로와 작은 평야가 한 눈에 들어와, 비록 낮은 산에 위치하고 있지만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남아있는 성의 흔적을 찾아보기 위해 주변을 답사하였지만 여름이라 수풀이 우거져서 성벽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성벽일 것으로 추정되는 곳을 걷다가 성안에 내리는 빗물을 흘려보내기 위해 인위적으로 낸 물길의 끝부분을 보았다. 그 밑을 보니 성벽의 일부분이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물이 흘러내리면서 성벽의 일부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에 성벽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계속 답사를 하였지만 수풀이 우거져서 성의 절반도 걷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성안에 남아 있을 흔적을 찾기 위해 밭 사이로 걸어가는데 기와와 토기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조각을 주워 모아보니 몇 분 지나지 않아 제법 많이 모였다. 과거의 역사를 복원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지도 모르는 옛 사람들의 손길이 남아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는 모습에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토기와 기와 조각

  이곳은 보은읍에 있는 삼년산성과 청원군 문의면에 있는 양성산성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여 시기적 상황과 지리적 위치상 학술적 연구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관계 기관의 무관심 속에 1500여년을 견뎌온 성벽의 일부가 심각하게 파손되었으며, 성안에는 무수한 기와와 토기가 방치된 채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성안은 개인이 농사를 짓는 밭으로 이용되는 등 다양한 이유로 훼손되어 가는 모습에 안타까움만이 가득한 답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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