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고도에서 느끼는 다섯까지 마음
전라도의 넉넉한 인심은 기세좋게 달리던 산조차도 숨죽이며 살금살금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전라도로 뻗은 길은 반대편으로 가는 것과는 참 많이도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경상도 방면은 넓게 뻗은 길들이 거미줄처럼 잘 연결되어 있고 길을 따라 자연을 이기고 들어선 집들과 공장들은 무수히 많은 차들과 매연을 쏟아낸다. 덩달아 마음도 바빠지고 속도 경쟁하느라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반면 전라도 방면은 자연이 주는 맨살의 황토빛이 그대로 드러나 나무의 흔들리는 감촉까지도 느껴질 듯 하다. 천천히 천천히 쫒김없이 나의 속도와 자연의 속도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목적지를 향해가고 있었다.
숨죽이던 산이 크게 한번 호흡을 하고 바닷속으로 잠수하기 직전 모습을 드러낼 때쯤 월출산이 나타났다. 바다를 향해 달리던 땅은 이곳에 이르러 잠시 쉬어가려고 자리를 잡았다가 주위에서 몰려든 바위와 나무들을 만나 한껏 산세를 뽐내면서 달리기를 멈추고 삶의 무대를 삼은 것 같았다. 그중 일부는 달마산까지 달렸고, 그 중 또 일부가 달려 서남해안의 무수히 많은 섬이 된 듯 하다. 우리는 바다로 뛰어들기 직전에 육지에 남아 달마산이 된 곳으로 간다.
오늘의 목적지는 달마산을 한바퀴 도는 달마고도이다. 달마산 입구에 들어서서 미황사로 가는 길은 속세의 공기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창문을 여는 순간 달마산 숲이 만들어낸 공기는 상쾌함으로 온몸을 붕뜨게 하는 느낌을 주었다. 속세에는 에어컨 바람이 있다면 달마산에는 솔바람이 있었다.
달마산 미황사 입구까지가 자연이 인간에게 허락한 공간이었다. 미황사 주차장부터는 온전히 인간은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산의 품안에서 하루종일 즐거움과 겸손함을 느낄 것이다. 산의 품안에서 어느 누구도 차별 받지 않을 것이고 어느 누구도 하찮은 존재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이름없는 잡초도, 이미 생명을 다한 하얀 꽃잎도 아직 다 익지 않은 산딸기도, 산꼭대기에서 흘러내리고 있는 수많은 돌들도, 길을 막고 있는 뱀도 모두 달마산이 품은 자식들이고 일부이며 지켜야할 것들이다. 만물의 영장 사람들조차도 맨몸으로 맨손으로 이곳에서 온전히 공존해야 한다.
신발끈을 조여매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미황사 대웅전으로 난 계단을 딛고 한걸음 한걸음 걸음으로써 욕심을 덜어내고 있었다. 결코 욕심을 낸다고 서둘러 갈 수도 없고 뛰어갈 수도 없는 마지막까지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다가설 수 밖에 없는 곳이었다. 축대위에 올려진 대웅전 앞으로 넓은 마당이 들어왔다. 탑이 있어도 좋을 것 같지만 오히려 미황사는 아무것도 없는 비움의 마당이 더 어울렸다. 탑은 대웅전 뒤로 솟아있는 바위들이 대신해도 충분할 것 같았다. 이제는 시간이 흘러 민낯 그대로 아무런 치장을 하지 않은 듯한 대웅전은 달마산의 바위들을 꼭 닮아있었다. 스님의 염불외우는 소리는 누군가를 위해 기도를 해주고 있었고, 나는 마음속으로 가족의 행복을 빌었다. 이승이든 저승이든 어느 곳에 있든 나에게 스며든 모든 인연들을 위해서.
대웅전을 뒤로 하고 그 오른쪽 어깨에 서 있는 응진전에 올라섰다. 그리고 돌아서서 보이는 바다는 부처님의 미소같기도 하고, 부처님의 눈웃음 같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니 무엇하나 미워할 수 없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게 대해 사랑으로 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황사는 신라 경덕왕때 바다에 돌배가 땅끝마을에 나타났고 배안에 검은 바위를 깨뜨리니 큰 소가 나왔고, 불경과 경전을 실고 가던 소가 마지막으로 멈춘 곳에 지은 절이라 전해진다. 윈래는 금강산까지 가야하나 비슷한 달마산에 모시기로 했다고 전한다. 미황사의 미는 소 울음소리가 아름답다는 의미있고 황은 금빛의 빛깔을 뜻한다. 해질녘에는 실제 그러할 것 같았다.
달마고도 둘레길을 시작하기 전 우리는 일단 밥부터 먹었다. 맛집으로 소문이 난 곳이었지만, 내가 한 경험치에서는 연잎밥은 썩 좋은 추억은 아니었다. 맛있다고 했지만 고드밥처럼 굳고 딱딱해서 마치 누룩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갈하게 한상차려진 밥은 절집에서 주는 밥을 닮아있었다. 그리고 느껴지는 촉촉한 연잎밥은 여러가지 재료들과 어울려 굳이 반찬을 먹지 않아도 될만큼 맛있었다. 앞으로 누군가 해남을 온다면 이곳에서 꼭 밥을 먹기를 권하고 싶다. 그리고 함께하는 팥빙수도.
친절하게 안내되어 있는 둘레길을 걷기 시작했다. 깨끗하니 쓰레기 하나 없는 길에는 걷기에 좋을 만큼의 흙길로 시작되었고, 굳이 햇빛을 가리기 위해 모자를 꾹 눌러쓰지 않아도 되었다. 달마산 숨향기를 느껴보려면 오히려 모자는 방해가 되는 존재였다. 생명을 다한 하얀 꽃은 달마고도를 꽃길로 만들어 주었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들은 연두빛과 맑은 녹색을 뽐내고 있었고, 산 중간 중간을 장식하고 있는 조릿대들을 보며 남쪽으로 한참을 내려와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이한 것은 산 정상에서 트럭으로 쏟아부어 놓은 것처럼 바위같은 돌들이 산 중간 중간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치 바위들의 무덤인 마냥 바위들의 계곡인 마냥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산의 한두군데 쯤 그런 모습을 본 적은 있지만 수시로 이런 풍경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 바위들 사이로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 방법으로 돌들을 포개고 잘개 쪼개어 오솔길처럼 누군가가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많은 돌탑들이 수시로 여기저기에 만들어지고 있었다. 몇년이 더 흐른뒤에 온다면 돌탑들의 천국이 되어있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산이 바다를 지켜주는 것인지 바다가 산을 지켜주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쩌면 누군가가 누군가를 지켜준다는 것은 인간이 구분해 놓은 욕심일지 모르지만 달마산과 바다는 서로를 지켜주며 바라보며 있었다. 산으로 들어서다가도 바다가 나타나고, 바다가 나타나는 듯 하면서도 산속으로 걸어들어가고 이런 풍경들이 반복되었다. 모퉁이를 돌면 끝날 것 같았지만 다시 시작하고, 시작일 것 같지만 돌아나가는 길은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산아래로 바다옆으로 잘 정리된 논이 있었고, 무엇을 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욕심을 내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인간이 원하는 것을 내어줄 수 있는 갯벌과 바다에 기대어 사람들이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었다. 산아래 사람들은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듯 했다.
한참을 돌아 우리가 가는 곳의 최고 높은 곳 도솔암을 향했다. 산길을 걷는 것이었지만 평지의 완만한 길을 걷는 듯 했던 지난 몇시간과는 달리 도솔암가는 길은 가파른 산길을 걸어야 했다. 그리고 만나는 자연의 위대함과 인간이 겸손하게 한뼘의 땅을 빌려 세운 도솔암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가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좁은 곳에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밀려 들어왔지만 누구하나 부딪침없이 물흐르는 듯 자신들이 즐길 수 있는 만큼 충분히 즐기고 갈 길을 향했다. 아담한 도솔암은 마치 산신당 같은 느낌이었고, 목탁만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고 스님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처사라는 분이 와서 사람들이 하는 부탁하는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도솔암도 멋있지만 그 옆을 몇십년동안 세찬 바닷바람을 맞으며 함께 서있는 나무도 멋있고, 도솔암의 돌담도 멋있었다. 감히 이곳에 돌담을 쌓을 생각을 누가 했으며, 그렇게 쌓은 돌담은 바람에도 무너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암자와 나무와 돌담은 서로 잘났다고 뽐내지 않고 서로에게 어울릴만큼만 자리잡고 사이좋게 이웃으로 지내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원래 출발했던 곳에서 쌉쌀한 오미자차를 한잔 마시는 것으로 달마고도 둘레길을 완주했다.
5가지 맛을 낸다는 오미자차를 나는 5가지 맛을 느껴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달마고도에서는 포근함, 넉넉함, 청량함, 대단함, 겸손함 이 다섯까지 마음을 느꼈다. 그리고 들려오는 종소리에 한번더 마음이 차분해짐이 밀려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