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에서 만난 단재와 남겨진 과제
연길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신채호는 청도회담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가 이회영의 초청으로 북경으로 왔었다. 이곳에서 박자혜 여사와 재혼을 하고 아들도 태어나면서 잠깐의 행복을 누렸던 곳이며 북경대도서관에서 많은 자료를 보며 연구를 했던 곳이다.
그가 살았던 후퉁을 찾았다. 첫 번째 간 곳은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과정에 참여해 활동하다가 실망감을 안고 돌아와 살았던 챠오떠우후퉁이었다. 이미 많이 개발되어 버린 이곳에 이방인의 독립운동을 기억하는 사람도 없을 뿐 아니라 그의 유적이 남아 있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신채호가 살았고 결혼생활을 유지했던 챠오떠우후퉁은 난뤄구씨앙의 한 부분이었다. 난뤄구씨앙은 우리나라로 보면 인사동이나 전주 한옥마을 같은 분위기였다.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로 나와 걸으면서 이곳의 전통과 현대적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우리는 단재가 살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후퉁을 걸으며 그때의 모습을 상상하며 걸었다. 난뤄구씨앙을 중심으로 수많은 후퉁들이 복잡하게 이어져 있어 독립운동가들이 숨기에 적당해 보였다.
후퉁을 나와서 꾸러우를 갔다. 꾸러우는 명나라에서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베이징에서 하루를 마감할 때 두드리던 북이 있는 곳이다. 그 맞은 편에는 하루를 시작하는 쭝러우가 있다. ‘아침종 저녁북’으로 하루를 움직이던 것이 베이징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일상이었다. 그러나 꾸러우의 북은 1900년 8개국 연합군 침입 시 일본군이 칼에 찢겨 버렸다. 이 꾸러르 부근에서 단재는 베이징에서 마지막 8년을 보냈다. 지금은 꾸러우를 올라갈 수 없어서 바라만 보았다.
다음으로 단재가 처음 북경에 와서 살았던 진스팡지에를 갔다. 이곳 주변은 이미 개발되어 버렸고 다만 단재가 살았었을 것으로 보이는 집은 남아 있었다. 이곳에서 단재의 흔적을 찾기란 너무 어려웠다. 단재가 살았던 곳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이회영이 살았을 것으로 보이는 곳이 있는데, 이곳도 개발의 바람을 피하지 못했다. 중국에 있는 독립유적지를 좀 더 일찍 찾아내고 보존하는 일을 해야 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진스팡지에를 나와 큰길 건너 루쉰박물관으로 갔다. 늦게 도착해서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북경대 교수였던 루쉰과 신채호가 큰길을 사이에 두고 이웃으로 살아가면서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찾기 위한 노력의 공감대를 서로 형성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았다.
저녁에는 단재의 자부를 만났다. 아프신 몸으로 단재의 흔적을 찾으러 이 먼곳까지 온 손님들을 그냥 돌려 보낼 수가 없어서 나오셨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런저런 이야기와 함께 성악을 전공하신 선생님께서 아리랑을 불렀고 우리도 함께 부르면서 아픔을 함께 하였다. 이곳에서 함께 아리랑을 부르니 나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쳐 왔다.
다음 날 신채호가 공부했던 북경대도서관을 찾았다. 우리나라 유학생의 인솔하에 캠퍼스 투어가 진행되었다. 북경대도서관에는 단재가 발행한 천고라는 잡지의 유일본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도서관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천고를 볼 수도 없어서 아쉬움만이 가득했다.
남겨진 과제들
내가 중국으로 떠나던 8월은 광복 70주년이 행사를 거창하게 진행하고 있었고 8월 14일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까지 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있었던 1945년 광복보다 1948년 정부 수립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건국절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 한국사에서 근현대사를 축소하려는 움직임, 역사교과서의 국정화 시도 등과 비교해보면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들이다. 여전히 친일의 뿌리는 깊어 청산되지 못하고 있으며, 독립운동가들은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친일파 재산 환수에 불복하여 소송을 제기하는 친일 후손들 있는가 하면 심지어 친일한 인물이 독립 운동으로 둔갑한 경우도 있다. 올해 상영된 영화 중 최고의 관객을 동원한 암살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약산 김원봉은 해방 이후 조국으로 돌아왔다가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잡혀가 폭행을 당하는 어이없는 일을 당하기까지 했다.
단재 신채호 역시 광복 이후 임시정부 시절 이승만과 대립한 결과 독립운동가로서의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심지어 국적조차 없었다. 다행히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2009년에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하였고 그가 살았던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고드미마을에는 그의 묘소와 사당 그리고 기념관이 있어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찾고 있다.
이번 답사는 신채호의 독립운동 흔적을 찾아 떠난 답사였지만 신채호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답사를 통해 신채호의 정신만큼은 확실히 계승하고 발전시킬 의무가 우리들에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