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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을 주는 모기나라 Nov 17. 2015

괴산으로 떠나는 답사 - 두번째이야기

담장이 이쁜 김기응 고택의 향기

  지금 대한민국은 걷기 열풍이다. 제주도에 올레길과 지리산의 둘레길이 생긴 이래 전국에는 많은 테마 길이 조성되었는데, 괴산에도 괴산댐을 따라 산막이 옛길이 조성되어 있다. 산막이 옛길 가는 길에 칠성초등학교를 지나 우회전 하여 성산마을에 들어서면 국가중요민속자료 제 136호로 지정된 김기응 가옥이 있습니다. 마을에 들어서는 순간 길을 따라 늘어선 담장과 그 담장을 장식하고 있는 무늬들이 옛집의 멋스러움으로 다가왔다.


  집 앞 작은 공간에 마련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집 앞에 서니 소나무 숲(풍수지리와 관련이 있어 소나무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으로 이루어진 낮은 동산을 배경으로 남쪽으로 바라보며 양지바른 곳에 위치하고 있는 김기응 가옥은 이곳의 환경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적당한 곳에 적당한 크기의 적당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집을 등지고 돌아서면 농부들의 땀방울이 오롯이 묻어나는 괴산의 명물 고추들이 빨갛게 익어가고 그 앞으로 넓은 칠성들의 벼들이 살랑거리는 바람에 물결치듯 하며, 그 너머로 높은 산들이 구름에 휘감겨 있었다.

   담장을 따라 집 주변을 둘러보고 집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솟을대문 앞에서 이리 기웃 저리 기웃거렸다. 솟을 대문은 약속을 하지 않은 손님에게는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행히 옆으로 쪽문이 있어 살짝 밀었는데, 삐걱거리는 소리가 천둥보다 더 크게 나서 순간 멈칫 망설이다 한발을 딛고 안을 보았다. 삐걱거리는 소리에 금방이라도 사람이 뛰쳐나올 듯 집안은 너무도 조용했다.


  대문을 들어서니 마당이 나타났고 마당 왼쪽에는 또 하나의 광채가 길게 배치되고 그 위쪽으로 중 문간채가 있고 오른쪽에는 마당보다 한 단계 높은 곳에 사랑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중 문간채를 (ㄹ)자로 꺾어 들어서면 왼쪽에 헛간채, 오른쪽에 다시 중문이 있어 이곳을 들어서면 안 행랑채와 안채가 있다. 보통의 집이 대문, 사랑채, 중문, 안채 순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집은 중문 다음에 안쪽 행랑채가 더 있어 이곳을 돌아서 지나야 안채로 들어설 수 있다. 이와 같이 대문채, 중문채, 사랑채, 행랑채, 안채, 광채, 헛간채로 구성되어 있는 규모가 매우 큰 집이며, 작은 공간들이 여러 형태의 대문으로 연결되어 마치 미로 같기도 하다. 집을 지은 기법이 옛 법식을 잘 따르고 있으며 크고 작은 공간구성의 배열 또한 짜임새 있게 갖추고 있는 양반집으로, 우리나라 전통 상류주택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는 건물이라 한다.


  안채는 튼 (ㅁ)자형 집이다. 안채는 원래 있었던 집으로 19세기 초반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실제로 새로 지어진 사랑채와 행랑채와는 느낌이 달랐다. 안채를 들어서니 신발만 가지런히 놓여 있고 인기척 하나 없었다. 신발 하나를 놓은 모습에서도 흐트러짐 없는 양반의 기품이 느껴졌다. 인기척 하나 없는 안채는 적막한 가운데 경외감, 푸근함마저 느껴졌다. 아마도 남향으로 햇볕이 잘 들도록 되어 있어 안채가 그늘지지 않아 밝은 분위기를 연출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안방, 부엌을 두었으며 오른쪽에 건넌방을 놓았다. 안방과 건넌방 앞에 툇마루를 만들었는데 건넌방 앞까지 설치해 통로로 이용한 점이 특이하며, 한쪽 옆면 전체(4칸 규모)를 부엌으로 크게 만든 점은 주목할 만한데, 이러한 규모의 부엌을 유지하였던 것을 보면 처음 이 집을 지은 가문도 사회적 지위가 높았던 것 같다.


  사랑채는 (ㅗ)자 모양으로 안채 쪽에 부엌, 사랑방 이어서 대청, 작은 사랑방을 두었으며 일각대문으로 연결하여 외부와 차단된 별당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이 집 구석구석을 둘러보는 동안 미로 같은 집을 다니는 재미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건물의 각종 벽에 장식된 아름다운 건축문양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아쉬움 또한 많이 남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집이 국가의 지원을 받아 새롭게 고쳤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건물은 서까래와 지붕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고, 각종 건물의 방은 농자재 창고로 쓰이고 있었으며, 문창살은 앙상한 뼈대를 드러낸 곳도 꽤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이 집을 둘러보고 떠날 때까지도 인기척 하나 없었던 것과 관계가 깊을 것이다. 한옥은 본디 쓸고 닦고 불을 지퍼야 오래 간다고 나는 배웠다. 그런데 이 집 역시 이곳을 지키고 가꾸어 나갈 사람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것은 우리나라 옛집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여기서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을 개인의 집안 문제로 돌리기에는 너무 옹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좋은 집을 지어놓고 가꾸어 나갔을 옛 주인은 지금의 모습을 본다면 무슨 생각이 들까?

사람사는 고택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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