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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을 주는 모기나라 Nov 17. 2015

괴산으로 떠나는 답사 - 세번째 이야기

공림사

  37번 국도를 따라 청천면을 지나 공림사가 있는 사담리로 가는 길은  맑은 물을 어디에서든 만날 수 있어 정갈한 느낌을 준다. 공림사는 사담리에서 왼쪽으로 접어들면 낙영산이 보이는데 그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공림사로 올라가는 길은 좁고 가파르지만 포장이 잘되어 있다. 산길을 얼마 지나지 않아 계곡을 지나면 숲 가운데 일주문이 보인다. 보통은 이곳에서 내려 걸어가지만 여기는 일주문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차들이 멈춤 없이 공림사 앞까지 내달릴 수 있다. 공림사 앞 큰 주차장에는 이미 많은 차들이 있었고, 등산복 차림을 한 사람들이 낙영산을 등산하고 있었다.

불을피한 유일한 건물인 일주문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나면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공림사를 보호해주는 나무들이 한 줄로 길게 늘어서 있는 모습이다. 오래된 나무는 오래전부터 무성한 잎들을 키워내며 공림사를 지켜주기도 하고, 때론 공림사의 아픔을 지켜주지 못한 슬픔을 안고 몇 백 년을 견뎠을 것이다.


  사연 많은 공림사는 신라 경문왕 때 자정이 창건하였다. 왕이 그의 덕을 추모하여 공림사라는 사액을 내렸다 한다. 1399년(정종 1년) 함허가 무너진 이곳을 다시 만들었고, 1407년(태종 7년) 자복사찰로 지정되었다.(자복사찰 - 국가의 번영과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 명복을 빌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사찰, 혹은 그렇게 된 사찰을 말한다.) 세조도 이곳을 참배했다 한다. 이후 임진왜란 때 왜군의 방화에 의해 주요 건물이 불탔는데, 다행히 대웅전은 바람이 반대로 부는 바람에 보존 될 수 있었다 한다. 그러나 바람이 지켜준 공림사는 6.25때 잦은 공비의 출현으로 일주문과 사적비만 남기고 모두 불에 타고 말았다.


  지금 공림사는 바쁘다. 공림사에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고 주변을 정리하면서 여기 저기 건축 자재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그러나 공림사에 새로운 건물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예스러움은 덜할지 모르지만 절이 차지하고 있는 멋스러움은 옛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함께 공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절의 병풍 역할을 하는 낙영산과, 절이 바라보는 풍경이, 아픔 많은 공림사를 여전히 살아 숨 쉬게 하는 힘이 되는 듯 했다.


  긴 행렬을 이루는 듯 서 있는 나무를 지나 계단을 올라서면 잘 가꾸어진 잔디, 그리고 거대한 탑이 하나 서 있고 그 뒤로 대웅전이 보인다. 그리고 계단 옆에 있는 범종루에는 조선 영조 때 만들어진 범종이 있다. 석탑은 마치 경천사지 10층 석탑을 보는 듯 했다. 그리고 주변으로 다양한 용도로 만들어진 건물들이 서 있고 조사당 옆의 산 아래에 조선 초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팔각원당형의 부도 2개가 쌍둥이처럼 나란히 서 있다. 원 위치는 알 수 없지만 비교적 완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남아있다. 대웅전 옆에는 석종형의 부도 1기가 더 있다.


  공림사에서 단연 최고의 보물은 공림사 사적비이다. 사적비는 1688년(숙종 14년)에 세운 것으로 조선 중기 사회상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그런데 사적비는 스님들의 공부방 뒤편에 있어 외부인들은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다행히 큰 스님의 허락으로 사적비를 만날 수 있었다. 사적비는 사각형 지대석 위에 복련이 조각된 화강암 비좌를 하고 대리석 비신을 세우고 팔작지붕 모양의 비관을 얹었다. 4면에는 모두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렇게 중요한 사적비를 안내하는 표지판은 입구 계단에 있어 설명과 실물을 비교하면서 볼 수 없고, 그 설명조차도 너무 어렵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미리 공부하고 오지 않는다면 사적비는 찾는 이 하나 없을 수도 있고, 설령 찾는다 해도 스님들의 허락을 받아야 하니 불편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또한 사적비가 있는 곳이 약간 음침하고 절 한쪽 귀퉁이에 위치하고 있어 관리가 잘되지 않아 흡사 방치되고 있는 듯 느낌이 강하게 들었는데, 일본에 있다가 돌아온 북관대첩비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것은 너무 과도한 상상력의 동원인가. 사적비가 제대로 관리가 되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는 또 있다. 나는 사정을 이야기하고 나서야 어렵사리 볼 수 있었는데, 이미 누군가는 이곳에 와서 자신의 흔적을 비석 상단에 너무나도 또렷하게 새겨놓았다. 이렇게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으며, 몰지각하게 답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 수준과 너무 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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