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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을 주는 모기나라 Nov 22. 2015

괴산으로 떠나는 답사 - 다섯 번째 이야기

문경새재

  길은 처음부터 길이 아니라 했다. 누군가가 걸어가고 또 누군가가 걷고 그렇게 사람들이 오고 가면서 길은 만들어진다고 했다. 예부터 백두대간이 길게 뻗어져 있어 영남과 중부지방은 단절되었고, 단절로 인해 사람들은 각각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내면서 삶을 영위해나갔다. 그러나 영남 사람들은 백두대간 너머의 사람들의 삶을 동경했고, 중부지방 사람들은 백두대간 너머 영남지방 사람들을 상상해왔다. 그래서일까. 백두대간을 사이에 두고 영남과 중부지방을 잇는 고갯길이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 아달라이사금 3년(156년)에 하늘재(계립령)가 열렸고, 158년에 죽령이 개척되었다. 고구려 장군 온달은 ‘계립령과 죽령 서쪽이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도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을 할 정도로 중요한 지역으로 자리 잡았다. 이 고개를 넘어 삼국시대 사람들과 고려 사람들은 소통을 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육상 교통이  중요시되면서 더 빠른 길을 개척하기 위해 노력했고, 조선 태종 때 새재가 개척되면서 그 결실을 맺었다. 한양에서 부산까지 새재는 14일, 죽령은 15일, 추풍령은 16일이 걸렸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령과 이화령 사이의 길이라는 의미로 새재라고도 했고 새롭게 난 길이라는 의미로 새재로 불렀다 한다. 조선 사람들은 이 길을 이용해 주로 소통하였다. 특히 과거를 보러 영남 선비들은 추풍령과 죽령보다 이 길을 더 선호했다고 한다.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은 미끄러진다고 하여 기피했다고 한다. ‘나는 새도 날아서 넘지 못한다’ 하여 새재의 또 다른 이름은 조령이다. 그만큼 험준한 산지로 군사적으로 요충지임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때 신립은 이곳을 버리고 충주 탄금대를 결전의 장소로 선택하였다가 패배를 한 역사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양과 부산을 잇는 영남대로 제 1의 길이었던 새재는 근대화와 산업화에 밀려 그 역할을 이화령과 추풍령에게 내어 주고 이곳은 전통의 시대로 남았다. 이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마음과 몸을 치유하고 TV 사극의 단골 촬영장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공로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돌려야 할 것 같다. 사연인즉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에 와서 무너진 성벽 위로 차들이 다니는 것을 보고 차량통행금지를 시켰다고 하기도 하고, 일제강점기 문경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했던 옛 추억 때문에 새재 길을 훼손하지 않는 이화령 방향으로 길을 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괴산 연풍 방향으로 새재 3 관문인 조령관을 올랐다. 조령관으로 올라가는 길은 무더운 여름이 없는 듯했다. 흙길을 걷는 포근한 느낌은 없었지만 하늘을 가릴 정도로 잘 관리된 나무는 비를 맞아 활기가 넘쳐났다. 울창한 숲 속을 따라 잘 닦여진 길은 등산 이라기보다는 산책하는 느낌과 더 잘 어울렸다. 무더위를 씻어낸 비는 계곡과 계곡을 만들어 흩어지고 만나면서 자신들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무들은 바람 따라 자신의 몸을 맡기면서 춤을 추었고 바람 속으로 자신만의 향기를 몰래 품어내면서 세상의 고약한 냄새들로부터 맑은 세상을 지켜내고 있었다.  


  본디 관광이란 과거를 보러 가는 길을 뜻했다. 조선의 양반들에게 과거 합격은 자신의 신분을 유지하느냐 못하느냐의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자신으로부터 4 대조 조상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관리로 출세한 자가 없으면 양반 신분에서 자동 탈락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를 보러 가는 길을 ‘빛을 보러 가는 길’이라는 뜻의 관광(觀光) 길이라 했다.


  나는 이 길을 단순히 놀러 간다는 관광의 개념으로 이 길을 걷는다면, 과거를 치르러 간다는 관광의 개념으로 걸었을 옛 선비들은 어떤 마음으로 오갔을까. 특히 과거 합격의 꿈을 안고 한양으로 향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오는 선비들은 이 길의 끝에 만날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어떤 마음으로 걷고 또 걸었을까. 그리움과 기다림은 산을 만나 길을 만들고 길은 다시 그리움과 기다림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20~30분쯤 걷다 보면 새재 제 3 관문이 눈에 들어온다. 문은 활짝 열려있었고 이곳을 지키는 병사도 이제는 없었다. 3 관문을 지나 길을 계속 걸으면 2 관문인 조곡관과 1 관문인 주흘관이 나올 것이다. 나는 3 관문을 지나 경상도 땅을 한번 만나고 다음 목적지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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