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풍의 보물들 - 연풍성지, 연풍 향교, 연풍 향청, 연풍향교
괴산군의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동쪽으로 계립령 ․ 조령 ․ 이화령을 경계로 문경과 접하고 면 전체가 소백산맥과 연결되는 험준한 산지에 위치한 연풍을 찾았다. 예전 같으면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힘들게 도착했을 것 같은 이곳은 현재 옛 사람들은 부러워 할 만큼 새로운 길이 개통되어 교통의 요지로 변했다. 이 첩첩산중 하늘아래에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삶을 펼쳐놓았고 그 흔적들을 곳곳에 남겨놓았다.
1.연풍향교
연풍향교는 1515년(중종10년)에 창건되어 여러 차례 고쳐서 유지되어 오다가 한국전쟁 때 명륜당과 동무, 서무가 불탔다. 그 후 1978년 대성전을 고쳤고 그 다음해 명륜당을 다시 지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명륜당과 대성전이 있고 그 외 고직사가 있다. 명륜당은 앞면 5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양식이고 대성전은 앞면 5칸 옆면 2칸의 맛배 지붕 양식으로 5성과 송조 4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명륜당과 대성전 사이에 내삼문이 있어 배움의 공간과 제사 공간을 구분하고 있고 향교의 기본적인 배치인 전학후묘의 형식을 따르고 있었다. 이곳에는『청금록』·『도유사선생안』·『연풍향안』이 보관되어 있어 이 지방의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2. 연풍성지
충북에는 천주교와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있는데, 제천의 배론 성지, 진천의 배티 성지와 함께 괴산에는 연풍성지가 있다. 연풍초등학교 맞은편에 연풍성지가 있다. 연풍성지로 가는 방법은 성지 주차장을 통해서 가는 방법과 향청의 한옥 대문을 통해서 가는 방법이 있는데 주차장 쪽으로 가면 연풍성지를 알리는 큰 돌로 된 표지석이 있다.
성지는 잘 조성되어 넓은 잔디밭을 조성하여 깔끔하게 되어 있었고 곳곳에 천주교 성지임을 알리는 시설물들이 있었고 연풍공소로 쓰이는 향청이 또한 자리잡고 있다. 향청 마당에는 큰 나무들이 서 있어 향청의 오랜 역사를 이야기해주는 듯하다. 여름에 찾아간 공소에는 예배를 보는 사람들을 위해 나무들 사이로 차양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연풍은 1791년(정조 15년) 신해박해 이후 천주교 교인들은 은거할 곳이 필요 했는데 여기도 박해를 피해 문경새재와 이화령을 넘어 경상도로 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교우들이 문경새재를 넘나들며 교우촌이 형성된 것으로 알려진 이곳은 교우들의 피난처로 경상도의 선교를 위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훗날 최양업 신부나 프랑스 선교사들이 비밀 교우촌을 찾아보기 위해서는 연풍을 거쳐 새재를 넘었다. 그러나 천주교 탄압은 더욱 거세졌고 1866년 병인박해 때 많은 신자들이 처형됐는데 그 사람들이 처형된 곳이 지금의 연풍 천주교 성지다.
1963년 천주교회가 연풍공소의 예배소로 사용하기 위해 조선시대 향청 건물을 구입하고 주변의 논과 집터 정리 작업을 하는 중에 박해 때 죄인들을 죽이는 도구로 사용된 형구돌이 발견되었고, 1968년에는 한국 천주교 103성인(聖人)에 속하는 황석두(黃錫斗:1811~1866)의 고향이 연풍으로 드러남에 따라 성지 개발이 본격화되었다.
처형할 때 사용한 ‘형구돌’은 직경이 약 1m, 둘레가 4~4.5m 정도 크기이며 바위 가운데 앞면에 직경 25~30㎝, 뒷면에 직경 7㎝ 정도의 구멍이 뚫려 있다. 형구돌 중 하나는 서울 절두산 성지에서 보관하고 있으며 나머지 두 개는 연풍 천주교 성지에 남아 있다.
3. 연풍 동헌
사람들은 괴산의 연풍이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도 단원 김홍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이곳 연풍은 김홍도가 조선 정조의 초상을 그리는 작업에 참여해 그 상으로 만 3년 동안 현감으로 지낸 곳이다(1791~1795). 중인 신분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직에 오른 것이었다.
김홍도가 업무를 보던 연풍동헌은 지금 연풍초등학교 안에 있다. 연풍초등학교를 들어서면 세월의 무게를 다 짊어지고 그 넉넉함을 그늘로 보여주는 느티나무가 자리하고 있어 이곳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깨끗하게 정돈된 운동장에는 인조잔디가 깔려있고 그 끝에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63호로 지정된 연풍동헌이 자리 잡고 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운동장을 가로질러 맞이한 연풍동헌에 지금은 어디에도 김홍도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다. 기록에 의하면 김홍도는 첩첩산중에서 현감으로 그리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지는 못한 듯하다. 중인 신분으로 현감이 된 것에 대한 신분적 한계 때문이었을까? 아님 평생을 그림과 함께 살아온 그가 행정적으로는 뛰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초등학교에 있는 역사를 품은 느티나무는 김홍도의 행적을 잘 알지 않을까?
연풍동헌은 앞면 5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1663년(현종 4년) 현감 성희위가 처음 지었고, 지금 있는 건물은 1766년(영조42년)에 이전 건물이 낡아 당시 현감 이덕부가 남쪽에 새로 지어 풍락헌이라 이름 붙인 것이 지금의 연풍동헌이다. 이후 1920년부터 연풍보통학교 건물로 사용하였다가 1972년 현 위치로 옮겨 연풍초등학교에서 관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연풍현 관아 안에 있던 많은 건물 중 남아 있는 동헌 건물로서 원래의 위치에서 옮겨지기는 하였으나 비교적 조선시대 동헌의 건축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어 그 의의가 크다 한다.
4. 연풍 향청
연풍초등학교를 마주하는 곳에 기와집 한 채가 보이는데 이곳이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13호로 지정된 연풍향청이다. 향청은 본래 조선 초 지방관의 행정을 보좌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던 유향소였으나 1489년(성종20년)에 향청이란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향청은 오늘날의 지방 의회와 같은 기능을 하던 조선시대의 지방 자치 조직으로 향리를 규찰하고 향풍을 교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세운 것으로 지방관의 감독 하 에 운영되던 자문기관이다. 본래 관청으로 설립되지는 않았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지방 군현의 업무를 일부 맡으면서 지방 관청의 기구가 되어 이아(貳衙)로도 불렸다.
연풍향청은 앞면 5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1681년(숙종17년)에 처음 지어졌다. 지금은 천주교 공소로 사용하고 있는데, 일제 때, 헌병대 및 주재소로 썼고, 광복 후에는 연풍지서로 사용되었다.
1963년에 천주교에서 매입하여 천주교 연풍공소로 사용되고 있는데, 용도에 따라 내부 구조가 많이 변형되었다. 이를 1995년에 원형을 살려 온돌방 2개소를 복원하고 홑처마를 겹처마로 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