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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 말고 달 Jul 04. 2024

무기력의 비밀

학교 밖 청소년 상담기

  2024년 6월 8일(토). 오늘 만난 청소년은 학교 밖 인생 1년 차 '신입'입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않은 청소년입니다. 지난번 입시설명회 활동에도 참여했고 오늘 활동도 열심히 참여하기에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상담을 잘하고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학업 중단 이유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꿈드림 담당자에게 간단한 내용을 듣고 쉬는 시간에 자연스럽게 물어보았습니다. 학교에서 자세하게 잘 안 가르쳐줘서 힘들었고, 자신이 학교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아서, 학교에 다니는 게 의미가 없어서 진학을 하지 않았다고 담담히 대답합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하는 솔직함에 물어본 제가 얼굴이 화끈거렸고 참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정작 학교에서 마음을 심하게 다친 건 그 청소년인데 집에 돌아온 이 순간에도 고구마 먹고 체한 것 같은 이 가슴 답답함은 무엇일까요?

  그래도 이렇게 나와 주어서 다행이고 고마운 일입니다. 학교 밖 청소년들을 상담하면서, 학교 내 학생들을 상담하면서 가장 힘든 사례는 바로 무기력에 빠진 내담자를 만나는 경우입니다. 정말이지 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은 결석이 많습니다. 오지 않는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무기력이 그 원인이라면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저는 익숙하기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지만 올해 처음 이 일을 맡게 된 센터 담당자는 많이 당혹스러워하고 미안해합니다. 학교 밖 청소년 중에는 무기력에 빠진 경우가 꽤 많습니다.  "나와야 도와주지요." 나온다고 약속을 했지만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고, 연락해도 아예 나오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담당자가 고충을 토로합니다. "원래 그렇다고, 잘하고 계시다."라고 위로했습니다. 학교처럼 입시나 취업에 반영되는 '출결'이라는 강제 유인 요인도 없으니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진짜 힘들고 도움이 절실한 학생은 아예 나오지 않는 청소년이니 그들을 위해서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꾸준히 관계를 맺으라고 조언했습니다.

  꿈드림은 청소년 상담복지센터와 같은 층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서 심리적으로 힘든 친구들은 상담복지센터와 연계를 하는 것이 필요하고, 정도가 심하면 의료적 지원도 받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무기력 탈출을 돕기 위해서는 다양한 측면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마음은 아프지만 우리는 각자가 할 수 있고 잘하는 일에 더욱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이 도움을 줄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입니다. 상담자는 쉽게 상처받거나 지치지 않고 오래 버텨야 합니다. 무기력과의 싸움은 인내심, 시간과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학습된 무기력

  학교에서 진로심리검사를 하는데 검사지와 OMR카드를 받자마자 한 줄로 쭈욱 긋고 엎드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다했냐고 물어보니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검사지는 읽어 봤냐고 물으니 자신과 맞는 게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직업은 대략 2만 개 정도 되는데 일일이 나하고 맞는지 맞추어 보려고 하면 시간, 노력, 비용이 많이 듭니다. 그러니 효율적으로 나의 진로를 찾기 위해서는 탐색 범위를 줄여 나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진로심리검사를 하는 실용적인 목적이라고 안내합니다.

  도움이 되는 거니 조금 더 진지하게 해 보라고, 다시 읽어보고 고칠 게 있으면 고치라고 했더니 '야옹'하고 고양이처럼 대답을 합니다. 순간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한번 더 물으니 계속해서 '야옹'하고 고양이 소리를 냅니다. 듣기 싫다는 것이죠. 반항이고 불복종인데 수동 공격을 하는 겁니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러나, 참아야 합니다. 교사를 화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이맘때 학생들은 가끔 권력 투쟁을 합니다. 호의적으로 대하면 약한 존재로 판단하고 소위 말하는 '기어오르는'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비폭력 대화를 해야 하지만 제대로 하기에는 상황과 장소가 여의치 않고 시간도 부족합니다. 수업과 검사를 진행해야 하니, 화를 참고 비폭력대화 방법만 빌려서 약식으로 '관찰-느낌-욕구-부탁'의 단계를 진행합니다. 관찰한 모습을 이야기하고, 제가 받은 당혹감과 모욕감도 이야기하고, 학생도 같이 참여했으면 하는 마음과 수업을 잘 진행하고 싶은 욕구도 이야기했습니다. 다 했으면 방해하지 말고 쉬라고 부탁하고, 다음에 천천히 너의 이야기를 들어보겠다고 했습니다. 다만 타인에게 피해 주는 것은 다수를 위해 단호하게 조치하겠다고 고지하고 다른 반응은 무시하고 빠르게 넘어갑니다. 학생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사라는 직업이 때로는 참 힘이 듭니다. 한편으로 '이 검사가 뭐라고'하는 생각도 듭니다. 낮은 학업 성취도, 반복된 실패감, 잦은 공부 압박, 무기력에 시달리는 학생에게는 본인 생각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귀찮은 일, 때로는 자신의 특성을 직면해야 하는 괴로운 이 과정이 반가울 리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도 이 학생은 살아 있는 학생입니다. 아직 개입할 틈과 희망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동료 교사의 말처럼 뇌사 상태에 빠진 '식물 학생'만큼 심각한 경우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때 엎드려 있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유심히 보면 다섯 가지 유형과 단계로 구분이 됩니다. 첫 번째 유형은 시험지를 받고 열심히 풀고는 있는 것 같으나 전혀 풀지 못하고 용쓰는 것만 하고 있는 유형입니다. 반쯤 엎드린 상태로 있는 힘을 다해 버티거나 저항하고 있습니다. 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하기 싫다는 감정이 만나 싸우고 있습니다. 물론 공부도 덜 되어 있지만 고도의 불안과 긴장 속에서 끙끙거리기만 있습니다. 문제는 제대로 풀지 못하고 시험과 자신과의 씨름에 모든 에너지를 다 사용하느라 탈진 상태가 됩니다. 마침내 예비종이 치면 그로기(groggy) 상태에서 당황하여 OMR 카드에 제대로 마킹도 하지 못한 채 시험을 마칩니다.

  두 번째 유형은 시험지를 받자 말자 엎드리는 유형입니다. 시험지와 답안지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습니다. 눈은 감고 있으나 그 마음속에서는 역시 치열한 다툼이 벌여지고 있습니다. 내면에서의 싸움의 양상은 첫 번째 단계와 비슷합니다. 그러다 역시 마침 예비종이 치면 대충 OMR 카드에 마킹을 합니다.

  세 번째 유형은 시험지를 받자마자 일자로 마킹을 하고 그대로 엎드리는 유형입니다. 엎드려서 무슨 생각을 할까요? 이 유형부터는 시험에서 아무런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학생입니다. 시험이라 조금 더 잘 수 있고 조금 더 쉴 수가 있습니다. 무기력에 빠진 학생들은 후드 티와 무선 이어폰을 방어 무기로 장착한 경우가 많습니다. 수업 시간에도 후드 티의 모자를 덮어쓰고 있습니다. 나는 수업에 참여할 생각이 없으니 건드리지 말라는 뜻이죠. 한쪽 귀에는 무선 이어폰이 있습니다. 음악을 듣고 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스마트 기기를 교칙에 따라 규제하는 경우에는 심리적 안정을 위해 그냥 끼고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네 번째 유형은 시작할 때부터 계속 그대로 엎드려 있는 유형입니다. 세상과 단절된 듯, 아니 자신이 세상을 놓아버린 듯한 모습입니다. 제발 인적사항이라도 표시하고 아무거나 마킹이라도 하고 엎드리라고 해도 도무지 일어나지 못합니다. 너무 재촉하면 다른 학생들 시험에 방해가 되기에 눈치를 보면서 조용히 조심해서 안내합니다. 시험이 끝나면 다시 전원이 공급되어 움직입니다. 이 단계부터는 가방 없이 등교하거거나 마지못해 빈 가방을 들고 오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다섯째 유형이 가장 위험한 유형입니다. 시험이 끝나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배터리가 고장 난 노트북 같습니다. 전원 잭이 연결되어 있으나 배터리 성능이 언제 정지되어 노트북이 꺼질지도 모르는 상태입니다. 이 단계가 매우 위험한 것은 배터리를 고칠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린 것이죠. 이렇게 학생들은 시험을 포기하는 다섯 단계를 밟아 가면서 무기력의 세계로 깊숙이 들어갑니다.

  모든 학생들에게 다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했지만 고등학교에서 진학지도를 할  때는 아무래도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눈에 잘 들어왔습니다. 중학교에서 생활안전부장과 상담복지부장을 할 때는 공부와 생활에서 밑바닥을 헤매는 학생들이 눈에 잘 들어왔습니다. 학교 밖 청소년들을 만나기로 마음먹었을 때에는 어차피 학교 안에서 잘하는 학생들에게는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 저라도 그렇지 않은 청소년에게 더 관심을 가지자고 생각했습니다. 진로교사를 하면서부터는 중위권 학생들도 궁금해졌고, 이제는 모든 학생들을 눈여겨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학교에 와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일까요? 그들은 어떤 욕망으로 살아가는 것일까요? 모두가 존중받는 그런 평등한 공간에서 주체로서 살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학부모와 교사, 그리고 사회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대리 만족의 도구로 존재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그들은 김민섭 작가의 <대리 사회>에서 처럼 "강요된 타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이라 믿으며 타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무기력은 어떠한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기운과 힘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도대체 무기력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요? 마틴 셀리그만(Martin E. P. Seligman)은 '학습된 무기력' 개념을 제시합니다.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을 반복 경험한 후, 다시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무력감에 빠져 그 상황을 벗어나는 방법이 있다 하더라도 시도조차 하지 않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무기력은 누적되어 만들어진, 다시 말해 학습된 결과이며, 이는 학습 능력의 저하, 부정 정서 등을 유발한다고 합니다. 셀리그만은 '전기 충격 개 실험'을 통해 도피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전기 충격을 지속적으로 받았던 개들은 도피가 가능한 상태에서 전기 충격을 받으면 낑낑거리면서도 도망가지 않고 그 고통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인다고 합니다. 회피하려는 노력이나 학습을 스스로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바로 학습된 무기력 때문이죠.  


  방임으로 인한 무기력

  최근에 많은 결석으로 유급 위기에 놓여 있는 학생 문제로 위기관리위원회에 참석했습니다. 돌봄의 상처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제도적 지원으로 경찰 및 아동보호전문기관, 구청, 교육지원청에서 합동 점검을 가기로 했습니다. 현재도 아동보호전문기관에서 사례 관리 중인 가정입니다. 관계적, 심리적, 교육적 지원 방안에 대해서 논의했습니다. 학교생활에 필요한 학습품, 생활 용품을 학교 복지 예산으로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등교하는 날에는 학생이 편안해하는 공간에서 좋아하는 활동을 중심으로 학교 생활에 재미를 붙이고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활동을 하기로 했고, 보호자의 동의를 받아서 종합심리검사를 실시하고 그에 따라 상담 활동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Wee클래스 전문상담교사가 참 고생이 많습니다.

  예전 생각이 났습니다. 초임 발령을 공업 계열 특성화고등학교로 받았습니다. 고등학교 입학 지원 가능 점수가 지역에서는 가장 낮은 학교였습니다. 학교에 가 보니 1년에 50명 정도가 자퇴 또는 퇴학으로 학업중단을 하고 있었습니다. 학교폭력이나 교칙 위반 등 징계에 의한 것이 많았고 학교 부적응과 경제적 사정 등도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학교 밖 청소년지원센터도 없었고, 다른 사회적 지지도 부족했을 때였습니다. 학교를 나가면 더 안 좋아지는 경우가 많았기에 자연스럽게 학생의 진급과 졸업이 지상 최대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초임시절의 열정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학교에 나오도록 노력했습니다. 학교에 오지 않는 학생이 있으면 출근길에 학생 집에 들러서 데려 오기도 했고, 가출한 학생이 있으면 밤늦게 가정 방문하거나 수소문해서 학생을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경찰서에서 연락 오는 경우에는 어느 관련 학교보다 가장 빨리 가서 데려오곤 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니 꽤나 귀찮게 하고 괴롭히는 행동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교직생활동안 학급담임교사를 맡은 해에는 단 한 명의 중도탈락자도 없었습니다. 그게 무슨 자랑 거리인가 남들은 얘기할지 몰라도 저에게는 가장 기쁘고 보람 있었습니다. 학업 성적이 많이 향상되어 원하는 곳에 취업하거나 진학을 하는 것만큼 의미 있었습니다.

  특성화고에서 학급담임교사를 할 때 만난 학생이 있었습니다. 가장 지도하기 힘들었던 학생이었습니다. 돌봄의 상처가 있었습니다. 한부모 가정이었는데,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웠고 어머니도 정서 심리적으로 힘들어서 남매를 제대로 돌보기가 어려웠습니다. 입학은 했는데 학생은 등교를 하지 않습니다. 보호자와 전화 연락도 되지 않았습니다. 몇 번이나 찾아갔는데 학생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졸업한 중학교 담임선생님과 연락이 되었는데 중학교 내내 그랬고 학년이 올라 갈수록 더 심해졌다고 들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아침에 일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정서 심리 상담을 연결하고 공유하면서 알게 된 내용은 힘든 현실을 피하기 위한 방어 기제가 한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매일 찾아갔고 어느 날 어머니를 만났는데, 아이들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급한 마음에 동사무소에 가서 사회복지사 공무원에게 부탁해서 같이 가정 방문을 했습니다. 아이들이 없었고 보호자도 계속 위험한 이야기를 해서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경찰의 도움을 받아 아이들은 찾았습니다. 아이들의 딱한 사정을 알고 있었던 동네 다른 분이 보호하고 계셨습니다. 천만다행입니다. 어머니는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었고 남매는 가정으로 돌아갔고 우리 반 학생은 잦은 지각과 결석 등 기복은 많았지만 무사히 2학년으로 진급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해 저는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갔고 그곳에서 적응하느라 바빠서 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출장길에 주유소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그 학생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평일 낮인데 어찌 된 일인지 물어보니 여러 사정으로 자퇴를 했다고 합니다. 하복이 아직 새것인데 못 입게 되어 죄송하다고 합니다. 동복은 학교에서 지원해 주었지만 하복은 본인 부담이라 동복만 계속 입고 다녔습니다. 안타까워서 제가 교복 가게에 데리고 가서 맞추어 주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출장 내내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끝까지 책임져 주지도 못하면서 내가 아는 세상이 전부라고, 너희들은 아직 세상 물정 모른다고, 힘들더라도 무조건 이겨내고 졸업장만은 꼭 따야 한다고 밀어붙였던 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돌봄의 결핍 때문에 생긴 상처이고, 애착 관계에서 받은 지속적인 좌절감 때문에 생긴 무기력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을 힘들어했습니다. 이겨 내려면 더 많은 시간, 더 많은 보살핌, 더 조심스러운 관계가 필요합니다. 돌이켜보니 더 많은 이해와 공감이 필요했는데 뜨거운 열정이 앞서 조심스럽지 못했고 저는 최선을 다했다고 자만했었습니다. 1년 뒤에 다른 주유소에서 또 한 번 만났습니다. 고졸 검정고시를 통과했고 신체검사를 받고 군대 입대할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잘하고 있다고 했고, 건강하게 잘 다녀오라고, 휴가 나오면 연락하라고 인사하고 헤어졌습니다. 그게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어디에서든 잘 살고 있을 거라 믿고, 그러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무기력에서 벗어나는 방법

  "기적처럼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기본이 안되어 있다고 혼내지 않기". 김현수 교수의 <무기력의 비밀> 표지를 넘기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문구입니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고 가슴이 덜컹거렸습니다. 무기력해지는 아이들을 돕기 위해 펼쳐 들었는데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불편했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김현수 교수의 여러 책과 강연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 책은 무기력의 형성 과정, 심리유형별 특징, 지원 전략 및 방법 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저자는 무기력의 원인을 무기력의 형성 과정을 통해 분석합니다. 우리 사회는 '획일적 성공 기준, 지나친 경쟁과 서열화, 조건적·평가적 양육 및 훈육 문화, 극핵 가족(자녀가 하나 아니면 둘인 사회)'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무기력에 취약한 사회적 배경이 된다고 합니다. 이런 사회적 배경은 가정과 학교라는 양육과 교육 시스템 작동에도 반영되어 과잉보호와 과잉 기대, 획일적 평가와 서열화를 가져옵니다. 이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질적 돌봄과 쉼, 자기 주도적 성장 기회 박탈로 이어지면서 아이들은 무기력의 세계로 점점 들어가게 됩니다.

  저자는 무기력의 심리유형별 특징을 통해 무기력한 상태에 대해 구체적으로 분석합니다. 첫째는 과잉보호에 따른 무기력 상태, 째는 과잉기대에 따른 무기력 상태, 째는 방임과 결핍에 따른 무기력 상태, 째는 순응에 따른 무기력 상태, 다섯째는 중독에 따른 무기력 상태가 있습니다. 중독에 따른 무기력은 고통스러운 상황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무기력입니다. 게임, 웹툰, 유튜브 등을 '진통제'로 사용하면서 고통을 피합니다. 무기력한 청소년이 선택하는 도피처인 것입니다.

  저자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회피'를 선택한 청소년들의 심리 기제를 루돌프 드라이커스(Rudolf Drelkurs)가 제시한 4가지 패러다임으로 설명합니다. 과잉 열망 때문에 힘든 청소년들은 '원하는 만큼 잘할 수 없다.', 경쟁 때문에 힘든 청소년들은 '다른 사람들만큼 잘할 수 없다.', 압박 때문에 힘든 청소년들은 '해야 하는 것만큼 잘하지 못한다.', 실패 때문에 두려운 청소년들은 '실패할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마음 상태에 놓여 있다고 합니다.

  진로교사로서 꼭 챙겨보는 TV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tvN에서 방송 중인 <유 퀴즈 온 더 블록>입니다. 다양한 분야의 진로 롤모델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재미도 있기에 수업에도 자주 활용합니다. 229회 방송에는 도박중독 치료 권위자인 신영철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님이 출연했습니다. 교수님은 "일반적으로 정신과 의사는 그렇습니다만 특히 중독을 보는 정신과 의사는 맷집이 좋아야 합니다. 재발이란 중독 시기의 당연한 결과이며, 그런 과정을 거쳐서 좋아집니다."라고 말합니다. 무기력한 학생들을 만날 때 교사나 상담자가 가져야 할 자세와 비슷한 것 같아 보였습니다. 무기력 해결에는 답이 없어 보이지만 희망은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기력이 학습되는 것처럼 낙관주의도 학습이 되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무기력은 근본 원인에 따라 문제 현상도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기에 무기력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기력해진 원인과 과정을 파악한 뒤에 개별화된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모두 처음부터 잠을 잤던 것은 아니다. 저마다 사연이 있다. 무기력, 무의욕, 무감각, 포기, 이렇게 지내기로 결정했거나 자연스럽게 이런 상태로 전이된 아이들. 내가 알고 있는 한 인간적 본능인 성장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고 무기력한 채 지내게 된 이면에는 분명 아픔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저자는 무기력한 아이들을 돕기 위해서는 마음의 심폐소생술, 다시 살도록 돕기, 유형별 접근 방법, 지원 전략 등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마음의 심폐소생술은 역설과 긍정, 환대, 참여, 존중으로 구성됩니다. 역설적 시도의 핵심은 '반복하던 잔소리 멈추기, 진심 어린 걱정 표현하기, 잘해주기' 등입니다. 무기력에서 벗어나 다시 살도록 돕기 위해서는 '격려'가 필요합니다. 격려는 낙담하지 않게 하는 것, 다시 도전할 마음을 가지도록 하는 것, 성공을 간절히 원하고 있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무기력한 아이들을 돕는 지원 전략으로는 회복탄력성 발휘하도록 돕기, 관계를 통해 도약하기, 성취 경험하기 등이 있습니다.

  저자는 무기력의 비밀은 "스스로가 되지 않고 남이 되려고 했던 데 그 원인이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자신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타인의 삶을 무작정 따라 하게 하거나, 많은 자녀들 또한 그렇게 따라가는 '타인 코스프레'의 삶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그냥 스스로가 되기로 한 순간에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스스로 나 자신이 되어서 살기에 참 어려운 세상이기는 하지만 결국 스스로를 회복할 때 자신만의 길을 발견할 수도 무기력하지 않게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이 곧 무기력의 비밀이기도 하다."라고 합니다.

  자신의 진로가 해답입니다. 자신이 좋아하고, 잘할 수 있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이 재미있고, 의미 있고, 행복해집니다. 이것은 100살을 살아 내야 하는 우리 아이들의 인생에서 지속 가능한 진로를 유지하게 하는 필수 조건입니다. 지속 가능한 진로를 위해서는 긍정 정서를 키우고, 자신의 특성을 이해하고, 강점을 계발 및 활용하고, 자기 주도적인 진로역량을 키우고 업그레이드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로적 관점에서 본 무기력 해결의 근본적인 방법입니다. 



[참고 자료]

대리사회, 김민섭, 와이즈베리, 2016.

무기력의 비밀, 김현수, 에듀니티,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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