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토). 5월에는 축제가 많습니다. 주말 도심의 도로는 축제로 교통이 통제되었습니다. 꿈드림에서 상담을 끝내고 버스가 정차하는 정류장을 찾아 몇 블록을 걸었습니다. 오늘은 동행이 생겼습니다. 입시설명회에 왔던 청소년인데 가는 방향이 같아서 같이 걷게 되었습니다. 설명회 내내 밝은 표정으로 집중했고, 눈도 맞춰주고 질문에 대답도 잘하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좋은 인상이 남았던 청소년입니다. 오늘 처음 본모습이긴 하지만 외향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이라 특별히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는데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걸까요?
걷는 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축제장 주변의 인파 때문에 걸음을 천천히 하게 됩니다. '속도'를 줄이니 더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방향'이 같으니 더 깊은 이야기를 합니다. 학교를 그만둔 사연,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 학교 생활, 현재의 생활, 이른 아침 등산 이야기, 축제장에서 마스코트 인형을 쓰고 행사를 도왔던 이야기까지 많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중고등학교에서 학교생활도 잘했는데, 어느 날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현타'가 왔고 그때부터 많이 힘들었고 결국 학교를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현타'는 ‘현실 자각 타임’을 줄인 말로, 헛된 꿈이나 망상 따위에 빠져 있다가 자기가 처한 실제 상황을 깨닫게 되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이때 대부분 무기력함, 허무함과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학교 밖 청소년들은 다양한 이유로 학업 중단을 하게 됩니다. 그중에는 이처럼 평범한 학생들도 많습니다. 학업 중단을 하는 그 지점에서 우연히 방아쇠(trigger)가 당겨졌기 때문입니다.
요즘 청소년들은 기성세대와는 전혀 다른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초경쟁 사회와 과잉 학원, 무한 비교와 욕구 증폭의 디지털 사회를 살아갑니다. 초경쟁 디지털 사회는 스트레스와 욕구를 점점 커지게 하는 '증폭기'이자 그 속도를 더 빠르게 하는 '가속기'입니다. 늘어난 스트레스는 보상 소비와 재미 중독에 빠지게 합니다.
경제적으로는 이전 세대보다 풍요해졌으나 폭발적으로 증가한 스트레스와 욕구를 해소하기에는 늘 돈과 시간과 관계가 부족합니다. 초핵가족 사회여서 '왕부담'과 외로움을 많이 느낍니다. 게다가 학원 등 바쁜 스케줄로 놀이와 사회적 상호작용도 적어 소통능력을 배울 기회도 적습니다. 저출산에 따라 경쟁자의 절대적인 수는 줄었으나 경쟁 시스템은 나날이 강화되어 24시간 비교와 경쟁에 노출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 한번 실수를 하게 되면 바로 '현타'가 심하게 오게 되는 것이죠. 빠른 성장과 빠른 전환이 강요되는, 실패를 극복하는 배움의 시간이 부족한, 회복탄력성을 경험할 기회가 부족한, 작은 성공이 모여 큰 성공이 되는 '스텝 바이 스텝' 성장 경험이 부족한 우리나라 청소년들에게는 더욱 회복하기 어려운 충격과 상처를 남깁니다.
학교의상처
"이 세상엔 분명 차이는 존재하오. 힘의 차이, 견해 차이, 신분의 차이, 그건 그대 잘못이 아니오. 물론, 나의 잘못도 아니오. 그런 세상에 우리가 만나진 것뿐이오. 그대의 조선엔 행랑 어르신, 함안댁도 살고 있소, 추노꾼도, 도공도, 역관도 , 심부름 소년도 살고 있소. 그러니 투사로 사시오. 물론, 애기씨로도 살아야 하오. 영리하고 안전한 선택이오. 부디 살아남으시오 오래오래 살아남아서. 당신의 조선을 지키시오."
tvN에서 방영된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11화에 나오는 명대사입니다. 2018년, 중학교에서 생활안전부장을 할 때 즐겨보았던 드라마입니다. 고등학교에 있을 때는 수능 만점자를 2명이나 가르쳤던 경험도 있는데, 중학교에 와서 아무도 맡지 않아 공석이었던 생활안전부장을 맡았습니다. 여태껏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상상 그 이상의 학생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교과지도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생활지도만 한정해서 보면 교직 생활의 만족도가 천당과 지옥을 오고 갔습니다. 그때 동료 교사가 웃으면서 건넸던 말입니다. '그대의 학교엔 누가 살고 있소? 1등급, 2등급도 살고 있지만 8등급, 9등급 아이도 살고 있소. 착한 아이도 많지만 사고 치는 아이도 많이 있소. 그러니 교사는 무엇으로 살아야 하오?'
초·중등 교육정보 공시 서비스인 '학교 알리미'(www.schoolinfo.go.kr/) 사이트에서 학교명을 검색하면 각종 공시 정보를 볼 수 있습니다. 가장 오른쪽에 있는 '학업성취사항'안에는 평가계획 및 교과별 학업성취 사항이 있습니다. 교과별 학업성취 사항을 보면 해당 학교의 학년별, 교과별 성취도 분포 비율이 나옵니다. A~E까지 성취 수준별 분포가 나오는 것이죠. 평균은 제공되나 고등학교와 달리 중학교는 표준편차가 제공되지 않으니 원점수가 있더라도 등수는 계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절대평가에 의한 자료이니 다른 학교와의 학력 비교는 어렵지만 학교 내에서 학업성취 수준별 분포는 알 수 있습니다.
대체로 A~E가 각각 20% 이내이면 적절하지만 평가 문항의 난이도, 학력 수준 정도 등에 따라 해마다 성취 수준이 고르게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학교를 보면 특정 과목에서 A가 30%을 넘는 경우도 있고, E가 50% 가까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절대평가이니 90점 이상이면 모두가 A입니다. 어느 중학교에서 어떤 과목의 A가 30%였고, 어느 학생이 24% 수준이라면 중학교에서는 잘한 것이죠. 그러나, 고등학교에서는 상대평가 등급이 같이 표시되는데 9등급제로 환산하면 석차백분율 24%부터는 4등급입니다. 중학교에서 A도 많았고, 학생회 임원도 하는 등 학교 생활을 잘했던 학생들도 고등학교에 오면 평범한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석차백분율 24% 학생은 잘하는 학생이나 부모와 본인이 원하는 대학의 학과와는 거리가 있으니 '멘붕'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학업 성취도 변별 구조 차이 때문입니다. 아파트 거래 정보를 보여주는 일부 사이트에는 이 자료를 모아서 학군정보로 올려 두기도 하는데, 여기에서 검색하면 지역별로 모든 학교의 국영수 성취 수준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가끔 학부모들이 이 정보를 보고 상담 때에 물어보시기도 합니다.
2022 개정 교육과정이 도입되면 달라질까요? 고등학교 내신은 상대평가 9등급제에서 5등급제로 완화됩니다. 1등급은 10%, 2등급은 34%까지로 넓어집니다. 학생들이 받게 되는 좌절감은 겉으로는 조금은 줄어들 듯 보입니다. 하지만 상대평가는 변함이 없으니 등급 소수점에서 변별은 다 됩니다. 게다가 수능은 여전히 9등급제와 백분위, 표준점수 체제 그대로입니다.
김현수 교수의 <사춘기 마음을 통역해 드립니다>에는 학교에서 상처를 받는 상황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학교라는 것이 여러 아이들이 번갈아가면서 주인공으로 나오는 드라마 시리즈였으면 좋겠지만, 학교가 연출하는 드라마는 3년 내내 주인공이 크게 바뀌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매일 칭찬받는 소수와 그것을 쳐다보는 다수 아이들의 심정을, 매일 사랑받는 소수와 환영받지 못하는 다수 아이들의 심정을 우리는 생각해 보고 느껴 보아야 합니다. 사춘기가 될 때까지 그들이 받은 총 칭찬 양은 총 꾸중 양, 총 무시 양에 비해 압도적으로 적을 것입니다."
김현수 교수의 <공부 상처>에는 7가지 공부 상처 유형이 나옵니다. 저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교의 상처'가 그것입니다. '학교의 상처'는 학교 교육의 지나친 경쟁에서 얻은 부정 정서와 무기력을 의미합니다. 학교 교육의 역기능이죠. 입시 위주의 교육과 학력 지상주의는 경쟁과 비교를 낳았고, 지나친 경쟁과 비교는 숫자로만 노력을 평가합니다. 9등급제 기준으로 2등급, 11% 이내라는 상위권 대입을 위한 숫자는 다수를 실패자 또는 평범한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낙인찍습니다. 학교 경쟁교육은 대부분의 아이들을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않는,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않아야 하는 존재로 만들어 버립니다. 몇 번의 실패 경험은 좌절감과 포기로 이어지고, 때론 회복할 수 없을 만큼 깊은 부정 정서와 무기력의 늪에 빠져들게 합니다. 입시 공부가 지상최대의 과제가 되어 버린 우리 사회의 구조, 여기에 편승하는 학교 문화가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안타깝습니다.
포기에서벗어나는방법
과도한 경쟁 사회에서의 부정 정서와 무기력은 사람으로 하여금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은 존재로 만들어 버립니다. 장기적인 시간 속의 목표보다는 단기적인 시간 속의 즐거움으로 하루를 연명하게 합니다. ‘부정 정서’와 ‘무기력’에 빠진 청소년들을 돕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학생들이 포기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김현수 교수는 <사춘기 마음을 통역해 드립니다>을 통해 사춘기 아이들의 고통, 방황, 반항의 원인을 '외로움'으로 제시하고, 교사와 학부모들의 이해와 공감이 청소년에게 도움을 주는 가장 중요한 방법임을 이야기합니다.
김현수 교수는 루비 페인(Ruby K. Payne) 박사의 제안을 이야기합니다. 루비 페인은 <계층 이동의 사다리>에서 동기를 부여하는 선생님, 친구, 선배와의 새로운 관계, 무엇이든 아이들을 움직이게 하는 새로운 배움, 열심히 살지 않을 때 뒤따라오는 결과나 고통 알게 하기, 아이의 다른 재능 발견해 주기 등 4가지를 해답으로 제시합니다. 저는 여기에 ‘긍정 마인드’를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긍정 정서는 모든 실패로부터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첫 발걸음이기 때문입니다. 긍정 정서는 연습으로 충분히 좋아질 수 있기 때문에 시도하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충분히 더 나아지고 좋아질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이야기하고 그 방법을 전해주고 격려하고 응원하려고 합니다.
오늘 꿈드림 입시 설명회 때에는 김현수 교수의 격려와 칭찬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자신의 길을 찾아 꾸준히 가는 사람들이 아름답다. 힘든 고비를 넘길 줄 아는 사람들이 멋지다. 작은 성공을 쌓으면서 기회를 새롭게 만들어 가면 된다."
이제 헤어질 시간입니다. 오늘 만난 청소년이 'structured'라는 시간 관리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하고 있다고 저에게 자랑합니다. 오늘 집단상담에서 얘기했던 행동 장치와 도구들을 본인도 사용하고 있다고 보여줍니다. 저는 잘하고 있다고 확신을 주고 칭찬하고 격려해 줍니다. 저도 원노트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하고 보여줍니다. 오늘 만난 모든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상처를 극복하고 성장해서 다시 저 축제의 장으로 씩씩하게 걸어 들어가 함께 신나게 어울리기를 기원합니다. 언젠가는 꼭 그리 되어야 하고 그리 될 것이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