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시작

몰입

by 경경 GyongGyong

대학 동기 녀석에게 고백이라는 걸 처음 하였다. 늘 같이 어울리던 다른 동기 녀석들이, 그렇게 고민만 하지 말고 일단 말해 보라고 떠밀어주는 바람에 용기를 내었다.


가을 초입 늦은 저녁, 학교 잔디밭에서 3시간 정도 주고받은 이야기 끝에, 여태 그랬던 것처럼 친구처럼 지내자는 말을 동기 녀석은 해 주었다. 작게 안도하고 땅이 꺼지는 듯한 커다란 실망감에 사실 조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다음 날부터 2주 동안 학교엘 가지 않았다. 때마침 중간시험 기간이었음에도 충격이 많이 컸다.


'아, 괴롭다. 가슴이 아프다. 아프다.'


저녁이 되어 조금 컴컴해지면 멀리 하늘을 보며 무언가 고뇌 비슷한 걸 하며 마음을 정리하려 하였으나 그저 떠오르는 단어는 아프다, 괴롭다, 뿐이었다. 앞으로 동기 녀석과 어떻게 지내야 하지? 이 경험의 의미는 무엇이지? 무슨 이런 좀 더 추상적으로 나아간 물음 같은 건 내 안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괴롭네, 아프네, 이상의 어떤 사고 과정도 그 2주 동안엔 없었다.


이때 일은, 거절의 아픔이라는 기억보다, 생각이란 걸 하고 싶었으나 끝내하지 못한 참담한 실패의 경험으로 기억한다.


이때 처음 생각한다는 것에 대해 흐릿하게 의식하기 시작한 것으로 기억한다. 생각한다는 것이 마음대로 그냥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라는 걸 처음으로 인식하였으며 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된 경험이었다. 그 뒤로도 오랫동안 생각이라 할만한 생각은 하지 못하였다. 그때엔 사실 어떻게 하면 생각할 수 있게 되는지를 몰랐다. 한 번도 생각하고 살지 않은 참담한 결과였다.


생각한다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리 판단할 수도 있겠으나 그날 이후 내 개인사에 있어서 처음 생각이라는 걸 하기 시작한 때를 기억하고 있다.


수학을 주로 다루어야 하는 전공에 대해 때늦은 후회와 자괴감을 느끼고 있던 때였다. 흥미는 물론이거니와 수학을 다룰 능력이 매우 부족하다는 걸 뒤늦게서야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고 손을 놓을 수는 없어 어찌어찌 학점을 따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며 전공 수업을 듣고 시험을 보아 겨우 학점들을 땄다.


한편 이런 상황들과 함께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은 근원적 욕구가 마음속에서 함께 일었다.


다른 무언가 잘할 수 있는 것이 반드시 자신에게도 있으며 그것을 찾아 증명해 내야 한다는 욕구였다. 이때 든 생각이, '왜? 난, 매번 무언가 써야 할 때면 스스로의 생각을 써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복사해서 붙여 넣기만 하고 있는 거지! 내 생각을 써야겠다!'였다. 그런데 쓰기 위해서는 무언가 자신 안에 쓸 거리가 있어야 하는데, 혹 있었는지도 모르겠으나 그 쓸 거리가 스스로가 느끼기에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쓸 거리를 자신 안에서 발견하지-인지하지- 못하였다. 머리를 쥐어짜고 가슴을 후벼도 안 보였다. 복사해서 붙여 넣기 외에는 사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우선은 자기 안에 무언가 채워 넣어야 한다고 본능처럼 느꼈다.


생전 가보지 않던 학교 도서관에 가서 소설책 한 권을 쥐고서 서가 구석에 바깥과 면하고 있던 창가 옆에 앉아 그냥 책을 펴고 읽기 시작하였다. 봄? 가을? 햇살이 면사포처럼 포근히 창가에 내려앉아 창가 시멘트가 부드럽고 따뜻하였다.


손에 집은 책은 박완서 씨의 소설책으로 기억한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다. 마냥 책 속의 글씨를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일념으로 미간을 한껏 찌푸리고 글자들과 씨름하였다. 식은땀도 나고 온몸이 경직되고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하던 때였다. 묘하게도 서서히 책 속의 배경으로, 인물에게, 그리고 사건 속으로 몰입되기 시작하였다.


앉아 있던 창가와 어깨를 맞대고 있던 서가 한 줄과, 의자에 앉아 살짝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이는 1미터 정도 시야 범위까지의 도서관 바닥과, 이 공간만큼의 천장만을 남겨두고 사방의 모든 사물과 사람이 흰색 배경으로 바뀌었다. 등받이가 없는 좌석 부분이 둥근, 다리 셋의 의자 위에 앉아 책 속으로 머리를 담그려는 듯한 자세로, 창가를 통해 들어오는 한 줄기의 햇살이 그어놓은 책 속의 그 한 줄 한 줄을 노려보고 있는 나만이 느껴졌다.


태어나서 처음, 아니 정확히는 두 번째로 텍스트에 몰입한 경험이었다.


책의 글자들이 엮어내는 사람과 표정과 풍경과 움직이는 사건들이 머릿속 돔 모양의 공간에서 홀로그램과 같이 재현되었다. 난 생생히 그 홀로그램과도 같은 이미지들을 볼 수 있었다. 내 머릿속 (마음속?)을 본 게 이때가 처음이 아닌가 싶다.


독서를 통한 이 몰입의 체험은, 그 뒤로 내가 책을 집어 들 수 있게 해 주었다. 또한 책 속의 텍스트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텍스트와 내 머릿속(마음속?) 현상이 그려내는 이미지를 인식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경험들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으나, 근원적으로 무언가 쓸 수 있는 바탕을 내 안에 마련해 주었다.

이전 01화글쓰기의 원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