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름이 주는 평안
종종 서로의 차이와 다름이 나뉨과 불편함의 구실이 된다.
‘의견이 달라서 함께 할 수 없다.’
‘성격 차이로 갈라섰어요.’
주위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나뉨의 원인이 서로 다름과 차이다. 그러나 조건적이고 제한적이긴 하나 다름이 서로 등을 지게 되는 원인이 아닌 안도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매우 협소한 조건이고 상황이긴 하나 적어도 개인적인 체험의 범위 한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연락 없어?”
“우린 어른이니까 아이가 걱정하지 않는 거라 연락이 없는 거겠지.”
“집에서도 저렇게 말을 하는데 밖에서는 어떻겠어.”
“집이니까 그렇지. 집에서 하는 게 안전하잖아. 밖에서 그래 봐, 큰일 나지.”
아이가 늦은 시간까지 연락이 없어 걱정하는 나와 태평한 아내. 요사이 말이 거칠어진 아이를 걱정하는 나와 태평한 아내. 무엇이 정답인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서로의 의견에 대한 반응에 따라서는 문제의 사안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각자 감정의 앙금만 남는 모순이 발생한다.
“가만 생각해 보니까 당신 말이 맞는 것 같아.”
"!"
“잠깐 되돌아 보았는데 그 말도 일리가 있네.”
"!"
1초 뒤면 사라질 감정으로 바위와 같은 앙금을 남길 다툼을 계속할 배짱이, 내게 없는 게 다행이다 싶다. 그래도 이 말 한마디를 할 수 있기까지 한 반백 년은 걸린 듯한 터무니없는 느낌이 든다. 사실 정치적인 구실로 채 납득이 가지 않은 상태에서 건넬 때가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이 말 한마디가 참 신기한 작용을 한다. 천하의 고집쟁이 바위를 깨부수고 이해와 납득의 기운을 마음속에 감돌게 한다. 새로운 것에 눈이 뜨이는 체험이기도 하다.
한마음으로 함께 하는 건 화합이라고 표현되나 이는 획일이라고도 표현될 수도 있겠다. 다름의 존재는 불화로 표현될 수 있으나 다양성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다. 정답은 모르겠으나 난 그 획일을 약간 보류하고 불화를 조금 참으며 다양성을 살짝 용인하는 편이 된 듯싶기도 하다.
서로 다름의 덕분이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