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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k Lee Speaking Oct 30. 2024

상처, 용서, 자유

그리고 이 모두를 가능케 하는 현재

#1. 상처

우리는 모두 과거의 어느 시점에 누군가로부터 크고 작은 상처를 받았다. 격하게 오간 감정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생채기에서는 얼마 간 피가 흐른다. 오래 걸릴 수도 있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 상처는 치유되기 마련이다. 물론 부모의 원수를 용서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지금껏 고통을 주는 대부분의 상처는 충분한 존중과 사랑을 주지 못했던 가족에 대한 실망감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바람직하지 못한 선택을 내린 과거의 자기 자신에 대한 후회 역시 그 비통함이 상처와 흡사하다. 지나간 일에 엮여있는 날 선 감정들은 반추를 통해 다시 현재로 흘러나온다. 우리는 계속해서 과거의 감정을 현실로 초대한다.


#2. 용서

시간이 흘러 감정이 서서히 해체되면 건조한 기억만이 남는다. 과거를 붙잡고 있던 끈이 조금씩 느슨해지는 게 느껴질 무렵, 용서의 가능성이 싹튼다. 이때 용서는 과거와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시도해야 한다. 


과거의 사건으로 인해 달라진 인생의 궤적은 현재까지 이어져 왔다. 현재에 후회를 주는 과거 어느 날의 선택이 만약 달라졌더라면, 현재에 고통을 주는 과거 어느 날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현재에 아픔과 분노를 주는 과거 어느 날의 인연이나 사람이 없었더라면, 당신은 이제껏 경험한 적 없고 앞으로도 경험할 수 없는 다른 삶의 궤적으로 흘러갔을 테다. 그 길로 갔더라면 당신의 삶은 객관적으로 좋을 수도(대부분 좋을 거라고 생각하기에 후회를 한다) 좋지 못할 수도 있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어쨌거나 당신은 그 선택을 내렸고, 그 사건을 겪었고, 그 인연을 맺었다. 당신이 결정한 일과 당신에게 발생한 사건과 인연이 현재의 당신을 빚어냈다. 당신은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당신은 이미 빚어졌다. 빚어지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기에, 그것에 대해 논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중요하지가 않다.


당신이 이미 빚어졌기 때문에 용서는 오로지 현재와 시도해야 한다. 지나온 궤적이 빚어낸 당신의 현재, 즉 당신의 처지와 인연을 너그럽게 포용할 수 있다면, 작은 한숨 한 번 내쉬며 허심탄회하게 '그래, 됐다'라고 읊조릴 수 있다면 당신은 현재를 긍정한 것이다. 긍정한다는 것은, 내심 마음에 들지 않는 처지나 인연을 억지로 포장해서 좋은 기억으로 탈바꿈시키고자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가 설파했던 고귀한 자비심을 베푼다는 미명 하에 '영적 우월감'이라는 그럴싸한 자부심을 획득하는 것은 진정한 자비가 아니다. 자비란 긍정하는 것이며, 긍정이란 좋고 나쁨의 구획을 나누는 판단의 침묵을 필요로 한다. 그 경계선을 그리지 않는 마음의 상태야말로 좋고 나쁨을 구분하지 않기에, 나쁜 것을 억지로 '좋은 것으로 포장'하려는 행위(선술 한 싸구려 자부심의 먹잇감이다)가 일어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는 것,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 만으로 감사를 느끼며 함께 존재하는 주변과 인연에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 긍정이다. 현재를 긍정할 수 있다면 지금을 빚어낸 과거의 모든 선택, 사건, 인연과 동시에 화해하게 된다. 끊임없이 반추하던 후회, 아픔과 분노, 고통이 모두 녹아 사라지는 기적이 일어난다. 과거에 얽힌 매듭을 하나하나 찾아가서 풀어내는 작업은 오랜 시간과 노력을 요할 뿐, 그 효과는 미미하다. 반면 현재를 단 한 번만 용서할 수 있다면 과거의 매듭 모두는 풀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소중한 것, 비록 한 때 아픔을 주었지만 이제는 포용할 수 있는 나의 일부가 된다. 윤회의 고리에 갇혀 고락을 반복하던 안타까운 중생은 현생에 단 한 번의 용서로 자신의 모든 전생과 동시에 화해한다. 그때 업장이 소멸하며 윤회로부터 해방된다.


#3. 자유

용서는 오로지 지금 이 순간에만 할 수 있고, 지금 이 순간과만 할 수 있다. 현재와의 화해를 통해 지나온 모든 과거와 화해하게 되며, 지금 있는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긍정한다면(즉 화해한다면) 더 이상 미래가 두렵지 않다. 


미래에 대해 말해보자. 우리는 미래를 두려워한다. 과거를 후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래를 두려워한다. 현재와 화해하지 못한 사람은 과거의 선택을 후회한다. 현재와 화해하지 못한 사람은 불확실한 미래에 지금 내리는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걱정하기에 미래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현재와 화해할 수 있다면, 지금 내리는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더라도 그때의 미래와도 화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이 자신감의 근원은 자기에 대한 믿음과 존중, 사랑이며 이것이 진정한 자존감이다. 일어났던 과거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 것,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지금 여기, 현재의 자신을 용서하고 화해했기 때문이다. 비로소 내가 나 자신과 친구가 될 때, 내가 나 자신의 믿음직한 동반자가 될 때 느껴지는 단단한 느낌이야말로 자존감의 정체다. 이는 자기 자신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을 통해서만 얻어진다.


과거의 후회나 상처로부터의 해방, 미래의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을 동시에 이룰 있는 열쇠는 현재에만 있다. 현재와 화해할 과거와 미래는 사라지며, 사람은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발걸음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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