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고통을 사랑이라 착각했다

아동기 외상과 관계의 반복, 그리고 회복을 위한 기술적 상상

by 민진성 mola mola

관계는 왜 다시 고통이 되는가

"왜 자꾸 똑같은 사람을 만나게 될까?"
어떤 사람들은 학대적이거나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관계를 반복적으로 겪는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도, 돌아서면서도 다시 익숙한 고통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이 비극적인 패턴은 의지나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외상이 남긴 심리적 구조와 신경계의 반응 패턴 때문이다.



아동기 외상이 뇌에 새기는 ‘기본값’

아동기의 뇌는 성인보다 훨씬 유연하고 민감하다. 이 시기에 경험한 정서적·신체적·성적 학대나 방임은, ‘사람’에 대한 기대 자체를 뒤틀어버린다. 특히 주양육자와 같은 애착 대상에게 받은 상처는 '사랑은 고통을 동반한다'는 잘못된 도식(scheme)으로 자리잡는다.


이는 성인이 되어도 타인을 신뢰하거나 감정을 건강하게 교류하는 데 심각한 왜곡을 초래하며, 종종 불안정한 관계나 폭력적인 상황에 둔감해지거나 오히려 안도감을 느끼는 기이한 현상으로 나타난다.



통계가 보여주는 재외상의 구조

여러 연구에서 일관되게 확인된 사실이 있다.
아동기에 대인관계 외상을 경험한 사람은, 성인이 되어 다음과 같은 위험성을 가진다.

1. 가정폭력, 데이트폭력 등의 피해자가 될 확률이 2~4배 증가

2. PTSD 또는 복합외상(CPTSD)의 발생 가능성 증가

3. 자해·우울·대인기피와 같은 정서적 불안정성과 연결 이러한 반복은 우연이 아니라 'trauma reenactment'(외상 재현) 현상으로 설명된다. 익숙한 고통이 안전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뇌가 위협을 감지하는 능력이 손상되어 오히려 위험한 상황을 ‘정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들은 왜 다시 외상을 겪는가? ― 인지와 신경, 그리고 감정의 역설

이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역학은 복잡하지만, 핵심은 세 가지다.

1. 왜곡된 자기 도식

"나는 사랑받을 수 없다", "내가 문제다", "날 좋아하는 사람은 의심스러워" 같은 신념이 반복된 학대를 통해 뿌리내린다.

2. 감각적 재훈련 실패

외상은 뇌의 편도체를 과활성화시키고, 신경계가 ‘위험’에 과민하게 반응하거나 반대로 감각이 마비된다. 결과적으로 위험 감지 실패 혹은 위협 과잉 반응이 반복된다.

3. 회피와 갈망의 교차

사람을 피하고 싶지만 동시에 인정받고 싶어하는 모순된 욕구가 관계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결국 ‘정상적인’ 관계가 낯설고 불편해 보이는 역설이 생긴다.



직업적 외상, 그리고 ‘타인의 고통을 다루는 사람들’

이 현상은 피해자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소방관, 간호사, 정신과 의사, 경찰, 변호사처럼 타인의 고통에 만성적으로 노출되는 직종에서는 ‘대리 외상(vicarious trauma)’이 발생한다. 특히 형사재판 변호사처럼 범죄자의 고통과 피해자의 고통 사이에서 윤리적·정서적으로 중첩된 갈등을 겪는 경우, 비밀유지 의무로 인해 주변에 털어놓을 수도 없다.

트라우마는 ‘감정’이 아니라 ‘노출’의 문제이기에, 이들에게도 정기적이고 체계적인 심리적 개입이 필요하다.



무엇이 이들을 구할 수 있을까?

1. 아동기 : 학교 기반 심리검사, 정서교육, 대체 애착 대상 확보

2. 청소년기 : 정체감 형성 프로그램, 안전한 또래관계 경험

3. 성인기 : CPTSD 맞춤 심리치료(감정조절, 대인관계 훈련, 신체기반 접근 등), 사회적 회복지지체계

4. 직업군 : 직무 기반 대리외상 예방 훈련, 피어 서포트 체계, 비밀유지와 병행 가능한 익명치료시스템 개발



기술은 이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

정서적 취약자를 위한 DTx(디지털 치료제)와 AI 기반 감정관리 툴이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예를 들어 AI 감정 로그 시스템: 일상 속 미묘한 정서 변화 감지 및 회복 안내, 게임 기반 회복 훈련: 관계 시뮬레이션을 통한 안전한 감정 연습, AI 동반자: ‘감정 반응 훈련’을 가능하게 하는 정서 피드백 기능 탑재, 전문직 대상 AI 감정 디톡스: 법률가·의료인 등 비밀유지 직업군을 위한 AI 기반 심리 디브리핑 시스템.

이 기술들은 인간 치료자의 한계를 보완하며, ‘일상에 스며드는 예방’이라는 새로운 치료 패러다임을 만들고 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시스템을 설계할 것인가

한 인간의 트라우마는 사회적 구조, 제도, 직무 환경에 의해 유발되고 반복되며 심화된다. 단지 ‘개인의 회복’만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제 정서적 취약성을 존중하는 알고리즘, 치료와 예방을 일상화하는 사회 시스템, 심리적 회복에 투자하는 윤리적 기술을 상상하고, 구축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우리는 모두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그 상처가 운명이 되지 않도록 하려면, 사회는 이제 개인의 내면에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기술은, 그 손을 내밀 수 있다.
익숙한 고통의 미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사랑을 다시 배울 수 있도록.




#2025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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