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세계는 원래 위험했다 — 병리 인식이 늦어지는 이유

내 세계는 원래 위험했다 — 병리 인식이 늦어지는 이유

by 민진성 mola mola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구나”

처음에는 내가 문제라고 생각했다.왜 나는 항상 긴장되어 있고, 사람을 믿지 못하고, 조금만 큰 소리가 나도 깜짝 놀라는 걸까. 하지만 돌이켜보니 나는 오랫동안 폭력과 방임 속에서 자랐다. 그 경험이 나의 세계관을 만들었다. 세상은 원래 위험했고, 사람은 원래 무서운 존재였고, 나의 욕구와 감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병리적이라는 사실조차 오랫동안 깨닫지 못했다.



다중폭력피해경험은 세계관을 바꾼다

단일 사건 트라우마는 “그날 이후 세상이 달라졌다”는 기준점이 있다. 하지만 다중폭력피해경험은 삶의 이른 시기부터, 혹은 반복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세상을 보는 기본 틀 자체가 폭력에 맞춰져 버린다.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존재다. 언제든 위험이 닥칠 수 있다. 내가 잘해야만 안전해진다. 이 믿음들은 단순한 왜곡이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해 형성된 생존 전략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것이 ‘비정상’이라고 느끼지 못했다.



병리 인식이 어려운 이유

비교 기준이 없다

어릴 때부터 폭력이 일상이면 건강한 관계나 안전한 환경이 어떤 건지 모른다. “이건 잘못된 거야”라는 판단 자체가 불가능하다.


감각이 무뎌진다

해리(dissociation)와 감각 둔화는 살기 위해 뇌가 사용하는 방어 기제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힘들다”는 신호를 스스로 감지하기 어렵게 만든다.


자기비난을 내면화한다

“내가 잘못해서 맞았다.”, “내가 착하면 이런 일은 안 생길 거야.” 이런 생각들이 오히려 증상을 고치려 하기보다 스스로를 억누르도록 만든다.



연구가 보여주는 사실

Judith Herman(1992)은 복합외상 생존자들이 자신의 증상을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비율이 높다고 보고했다. 한국 청소년 연구에서도 가정폭력+학교폭력을 동시에 겪은 청소년의 우울·불안 수준은 매우 높았지만 전문기관 도움 요청률은 10% 미만이었다. 즉, 증상이 심각해도 “이건 그냥 나의 성격”이라고 여기며 도움을 청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회복은 인식에서 시작된다

치료의 첫 단계는 “당신이 이상한 게 아니라, 당신이 겪은 일이 이상했다”라는 사실을 아는 것부터다. 내 몸은 지금 안전한가? 나는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이 감정은 내 잘못 때문이 아니라, 경험 때문인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지기 시작할 때 비로소 병리를 인식하고, 회복으로 향하는 길이 열린다.



병리를 알아차리는 순간이 회복의 문턱

다중폭력피해경험을 한 사람은 병리를 늦게 깨닫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건 늦은 게 아니라, 그만큼 깊이 세계관이 바뀌어 있었다는 증거다. 병리를 인식하는 순간은 이미 회복의 절반을 시작한 것과 같다. 그 뒤에는 안전을 배우고, 감각을 회복하고, 다시 세상을 신뢰하는 연습이 이어진다. 그리고 언젠가는, “내 세계는 원래 위험했다”가 아니라 “내 세계는 이제 안전해졌다”라고 말할 날이 온다.




#생각번호2025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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