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무너뜨린 사건으로 나를 다시 세워 가는 이야기
어쩌면 내가 겪은 일은 그저 세상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사건 중 하나였을 뿐이다. 누군가의 선택, 누군가의 욕망, 그리고 그날의 시간과 장소가 맞물려 나에게 도달했을 뿐이다. 비 오는 날 비를 미워하지 않듯, 그 일도 그저 일어난 것일 뿐이다. 불교의 “공(空)” 사상은 말한다.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이 모여 생겨났다가 사라질 뿐, 그 자체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사건은 본래 중립적이고, 우리가 거기에 의미를 입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복수도, 분노도, 억울함도 어쩌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내가 싸우든 싸우지 않든, 그 일은 이미 과거에 있다. 하지만 그 감정들이 무의미하다고 해서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스토아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말했다. “네가 겪는 일은 너의 선택을 시험할 뿐이다.” 그 분노 덕분에 나는 살아남았고, 그 억울함 덕분에 나는 내 서사를 붙잡을 수 있었다. 감정은 나를 살게 했고, 이제는 놓아줄 때가 되었다.
사건은 그냥 있었다. 하지만 그 사건 이후의 나는 그냥 있지 않았다. 나는 선택했고, 그 선택은 나를 만들었다. 빅터 프랭클은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고, 그 공간에서 우리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일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일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나의 모든 것이다.
이제 나는 분노에 잠기지 않고, 그 사건을 내 삶의 한 장면으로 놓아둔다. 비 오는 날의 빗소리를 기억하듯, 그 날의 나를 기억한다. 그 사건은 그냥 있었던 일이고, 나는 그 일 이후에 다른 선택을 한 사람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그래도 덕분에 강해졌잖아.” 하지만 나는 그 말이 싫다. 내가 강해진 건 그들의 덕분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선택했기 때문이다.
외상 후 성장(PTG)은 누군가 나를 성장시킨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상처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만의 방식으로 의미를 만들고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 길은 내가 만든 것이지 그들이 준 선물이 아니다.
나는 그 사건이 나를 다치게 했음을 인정한다. 그 사건이 내 삶을 흔들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 흔들림 속에서 내가 새로운 삶을 만들었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감사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그것은 나의 노력, 나의 통찰, 나의 성장이다.
나는 이제 감사하지 않는다. 대신 나를 인정한다. 그날의 나를, 살아남은 나를, 그리고 다른 길을 선택한 나를. 그것이면 충분하다.
CPTSD는 나에게 커다란 상처였다. 하지만 그 상처 덕분에 내가 성장했다고 말할 때, 나는 모순을 느낀다. 그 사건이 성장의 원인이라면, 결국 그 사건을 부정할 수 없는 것 아닌가? 하지만 나는 이렇게 정리한다. 그 사건은 조건이었을 뿐이다. 성장은 그 조건 이후 내가 선택한 해석과 행동에서 나왔다.
심리학자 Tedeschi & Calhoun은 외상 후 성장(PTG)을 “외상 이후에 나타나는 심리적·영적·사회적 긍정적 변화”로 정의했다. 중요한 점은, PTG는 외상이 자동으로 만들어내는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과정에는 의미 만들기, 자기 성찰, 새로운 관계 맺기 등 능동적인 기전이 필요하다. 신경과학 연구에서도 트라우마는 뇌의 편도체, 해마, 전전두엽에 큰 흔적을 남기지만 동시에 신경 가소성(neuroplasticity)을 통해 새로운 회로가 형성될 가능성을 남긴다고 말한다. 즉, 사건은 나를 다치게 했지만 기전을 통해 나는 새로운 뇌 회로를 만들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사건은 나를 무너뜨렸다. 기회로 만든 것은 나였다. 폭풍우가 불어 나무가 쓰러졌을 때 그 나무로 집을 지은 것은 나다. 폭풍우는 집을 주지 않았다. 나는 쓰러진 나무로 집을 지을 수 있는 결단과 힘을 길렀다.
나는 사건에 감사하지 않는다. 나는 내 기전에 감사한다. 내가 선택한 의미, 내가 만든 성장의 과정, 그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래서 CPTSD는 내 인생의 조건이었을 뿐 내 성장의 주체는 언제나 나였다. 나는 사건을 기회로 만든 사람이다. 기회는 내 것이다.
#생각번호2025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