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과 식탁

미식의 시대에 야만을 말할 자격

by 민진성 mola mola

문명은 폭력을 감추는 법을 배웠다

인류는 고기를 먹는 종이다. 하지만 고기를 먹는다는 사실 자체보다 더 중요한 건 그 행위를 어떻게 정당화하느냐다. 향유고래의 머리에 구멍을 내 기름을 퍼내던 시대를 우리는 ‘야만적’이라 부른다. 그러나 오늘날의 인간은 그보다 훨씬 정교한 방식으로 생명을 소비한다. 도살장은 멀리 있고, 식탁은 깨끗하며, 고기는 포장되어 있다. 문명은 폭력을 줄인 것이 아니라, 폭력을 미적으로 포장하는 기술을 발명했다.



미식은 세련된 잔혹이다

미식이란, 폭력을 ‘맛’이라는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이다. 불에 그을린 살과 지방은 더 이상 생명의 흔적이 아니다. 그건 예술적 경험, 문화적 교양, 감각의 쾌락으로 소비된다. 셰프의 칼은 살인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연출을 위한 도구로 전환되었고, 피는 조미료처럼 처리되어 더 이상 잔혹하지 않다. 미식은 생명을 죽이는 행위를 감각적으로 견딜 수 있게 만드는 문명의 미학이다. 그 미학 속에서 인간은 폭력을 잊는다. 혹은, 잊은 척할 수 있다.



야만은 타자화된 과거다

우리가 “그 시대는 야만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그 행위가 ‘지금의 나’가 하지 않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즉, 야만은 언제나 타자화된다. 하지만 오늘의 식탁을 미래의 누군가가 바라본다면 어떨까? 조명 아래 진열된 죽은 생명, “한정판”으로 나뉜 부위, 그리고 셰프의 칼질에 환호하는 관객들. 그건 어쩌면 정제된 제물 의식일지도 모른다. 문명은 단지 피의 형식을 바꿨을 뿐, 그 본질을 바꾼 적은 없다.



죄책감을 미감으로 덮는 기술

현대의 미식은 윤리적 이미지로 자신을 보호한다. ‘클린 미트’, ‘동물복지’, ‘지속 가능한 소비’. 그 언어는 인간의 죄책감을 달래는 포장지다. “셰프가 동물을 존중하며 조리했대.”, “이건 전통 문화야.” 이런 말들은 살생의 정당화다. 미식은 결국 폭력에 미적 필터를 씌운 의식적 위선이다. 우리는 도덕적 소비를 실천하며 스스로를 ‘착한 문명인’으로 만들었다.



미식의 시대에 윤리를 말할 자격

야만을 혐오하면서 미식을 찬미하는 것은 문명의 가장 세련된 모순이다. 우리는 폭력을 혐오하지 않는다. 단지, 그 흔적을 보기 싫어할 뿐이다. 진짜 윤리는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먹는다는 행위에 내재한 폭력을 잊지 않는 감각이다. 야만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매일의 식탁 위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재현된다. 인간은 야만을 경멸하면서, 매일 조금씩 야만을 소비한다.




#생각번호2025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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