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의 숨, 밤의 숨

CPTSD 이후, 낮이 너무 선명해서 숨이 막히는 이유

by 민진성 mola mola

낮의 공기는 유난히 무겁다

얼마 전 엄마와 낮에 마트를 갔다. 햇빛은 따뜻했고, 사람들은 평온했다. 그런데 나는, 숨이 막혔다. 냉장고의 윙— 하는 소리, 사람들의 대화, 계산대 앞의 조명. 모든 게 동시에 나를 덮쳐왔다. 몸이 반응했다. 누군가 나를 해치려는 것도 아닌데, 내 신경계는 이미 전쟁을 시작하고 있었다.



트라우마는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몸’

CPTSD는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몸이 기억한 위험 상태다. 그래서 위험이 없어도, 몸은 여전히 도망치려 한다. 심장이 조여들고, 호흡이 얕아지고, 가슴속 공기가 좁아진다. 나는 단지 마트에 있었을 뿐인데, 몸은 “여기서 벗어나야 해”라고 외친다.



낮은 너무 많은 ‘생명’을 품고 있다

낮의 세상은 살아 있다. 아이들의 웃음, 사람들의 걸음, 수많은 빛과 냄새. 그 활력이 나에겐 아름답기보다, 때로는 두렵다.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움직이고, 나는 그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 세상이 나를 밀어붙이고, 나는 겨우 숨을 붙잡는다.



그래서 나는 밤에 산다

밤이 되면, 세상이 멈춘다. 불빛은 최소한의 윤곽만 남기고, 사람들은 조용히 사라진다. 그제야 나는 호흡을 되찾는다. 누군가를 피해 숨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소음을 줄여야 내 안의 목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밤의 공기는 나를 살리고, 낮의 공기는 나를 삼킨다.



언젠가 낮을 다시 걷게 되겠지만

나는 언젠가 다시 낮의 세상을 걸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지금은, 밤의 숨을 배우는 중이다. 어쩌면 회복이란 ‘낮을 견디는 힘’을 되찾는 과정이 아닐까. 그러니까 지금의 나는, 밤 속에서 조금씩 ‘낮’을 연습하고 있는 셈이다.




#생각번호2025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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