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밤의 편의점에서만 인간이 된다

CPTSD 이후, 유일하게 안전했던 사회의 한 조각

by 민진성 mola mola

사람 없는 세상에서도, 나는 인간이고 싶었다

CPTSD 이후 나는 사람을 피한다. 낯선 시선, 예측 불가능한 말, 나를 판단할지도 모른다는 공기. 그 모든 것이 공포로 다가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밤늦게 편의점에는 간다. 누군가가 있더라도, 괜찮다. 그곳에서는 ‘관계’를 맺지 않아도 되니까.



편의점은 ‘사회’의 가장 단순한 형태다

편의점의 대화는 세 문장으로 끝난다. “안녕하세요.”, “이거 계산이요.”, “감사합니다.” 그 사이에는 어떤 감정도, 평가도, 상처도 없다. 편의점은 사회적 접촉의 최소 단위이며, 그 최소가 나를 지탱한다. 나는 그곳에서 “인간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 않고, 그저 ‘안전하게’ 연습한다.



조용한 밤, 통제 가능한 세상

낮에는 세상이 너무 빠르다. 말소리, 웃음소리, 시선, 진동하는 에너지들. 밤에는 그것들이 사라진다. 편의점의 냉장고 소음과 조명의 빛만이 남는다. 그곳에서 나는 세상을 조용히 바라본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세상 속에서만, 비로소 숨을 고를 수 있다.



그곳은 ‘소비 공간’이 아니라 ‘은신처’였다

편의점은 단순한 상점이 아니다. 불이 꺼지지 않는 작은 은신처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럼에도 내가 세상에 속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 그 익명성과 익숙함이, 나를 잠시나마 ‘정상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CPTSD와 ‘관계 없는 사회성’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도 말한다. “사람은 무섭지만, 편의점은 괜찮아요.” 그 말이 이상하지 않다는 걸 이제 안다. 우리는 관계를 피하는 게 아니라, 위험한 관계를 피하는 것이다. 편의점은 안전한 사회성의 시뮬레이션이다. 그 안에서 나는 조금씩 다시, 세상으로 복귀할 연습을 한다.



언젠가, 편의점 불빛 너머로

나는 아직 낮의 세상으로 나가진 못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불빛 너머의 거리로 걸어갈 것이다. 그때가 오면 알겠지. 밤의 편의점에서 버텨낸 시간들이, 결국 나를 인간으로 남겨준 시간이었다는 것을.




#생각번호2025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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