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PTSD 이후, 고통을 설명하는 언어에 대하여
나는 때때로 숨이 가빠진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몸이 먼저 긴장하고, 아무 일도 없는데 도망치고 싶어진다. 그래서 나는 내 상태를 조심스럽게 말한다. “요즘 좀 힘들어.” 그러면 돌아오는 질문은 늘 같다. “공황장애야?”, “그럼 불안장애?”, “정확한 진단명이 뭐야?” 나는 조금 멈춘다. 이 사람이 나를 이해하려고 묻는 걸까, 아니면 분류하려고 묻는 걸까.
나는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병명을 묻는 이유는 내 고통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자기 불안을 줄이기 위해서다. 병명이 생기면, 그 고통은 어느 ‘칸’에 들어간다. 칸에 들어간 고통은 무섭지 않다. 이름을 붙이면,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하지만 고통은 칸 속에 살지 않는다. 고통은 몸에, 숨에, 일상에 스며 있다.
내 경험은 발작의 순간이 아닌 지속적인 긴장으로 이루어진다. 몸이 항상 주변을 살피고, 위험이 없는데도 피하려 하고, 사람들의 말과 시선이 신호처럼 번쩍인다. 이건 ‘불안’이라 부르기엔 너무 구체적이고, ‘공황’이라 부르기엔 너무 조용하다. 이건 그저 몸이 오래 살아남으려 애쓴 흔적이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병명보다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가 더 중요해.”
누군가 힘들다고 말할 때 필요한 것은 적절한 이름도, 조언도, 비교도 아니다. 그냥 멈추어 그 사람 옆에 서 있는 일. 그게 전부다. 고통은 설명보다 동행을 요구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아, 힘들었구나.” 그 한 문장뿐이었다는 걸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내가 내 상태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건 내가 이미 한참 걸어왔다는 뜻이다. 고통은 여전히 현재형이지만 그 고통을 언어로 옮겨두는 나는 더 이상 과거에 갇혀 있지 않다. 나는 지금도 회복 중이다. 병명을 말하지 않아도, 내가 내 감각을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살리고 있다.
#생각번호2025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