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 옆에서는 CPTSD가 사라지는 이유
트라우마 이후 한동안 나는 내가 “망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몸이 늘 긴장했고, 숨이 쉽게 가빴고,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두려웠다. 그리고 병원을 오가며 이런 말을 들었다. “후성유전 변화가 있을 수 있고, 신경계가 과각성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내 몸이 영구적으로 손상된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원래 있던 기능’이 사라진 것처럼.
나는 분명 CPTSD를 갖고 있고, 평소에는 대인기피처럼 몸이 얼어붙는데, 어떤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다. 숨이 편안해지고, 가슴이 조이지 않고, 사람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 순간의 나는 마치 CPTSD 이전의 나처럼 존재했다. 그게 가장 혼란스러웠다. “고장난 거라면… 왜 이럴 때만 멀쩡한 거지?”
나는 나중에서야 알았다. 후성유전적 메틸화는 기능을 없애는 변화가 아니라, ‘기본값’의 민감도를 바꾸는 변화라는 걸. 즉, 내 몸은 위험을 먼저 감지하는 방향으로 세팅되어 있을 뿐, 안전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사라진 게 아니었다. 내 몸의 문제는 사람이 싫은 것이 아니라 위험과 안전을 구분하지 못하는 과잉 경계 모드에 있었다.
몸은 혼자서 감정을 안정시키도록 만들어져 있지 않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다른 사람의 숨, 표정, 목소리, 시선으로 감정을 조율하는 존재다. 이를 공조절(co-regulation)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내 신경계에 위협 신호를 준다.
어떤 사람은 내 신경계에 안전 신호를 준다.
그리고 안전 신호가 입력되면, 내 몸은 바로 부교감신경 모드로 전환된다. 그 순간 CPTSD는 잠시 배경으로 사라진다. 나는 고장난 게 아니었다. 나는 단지 너무 오래, 혼자 버티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오랫동안 “나 혼자 완벽하게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진짜 강함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강함은 혼자 버티는 것이 아니라, 안전한 사람 옆에서 숨을 되찾는 데서 시작된다. 내 몸은 여전히 회복할 수 있고, 실제로 회복하려고 하고 있다. 그 사실을 증명해 준 건 병원도 책도 아니었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의 나 자신이었다.
나는 더 이상 내 몸을 비난하지 않는다. 이 몸은 모두가 떠난 곳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으려 애쓴 몸이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생각번호20251110